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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예술협회, 한국전통의 맥 '류파별 100인 춤전' 9일(사)한국전통예술협회가 주최하는 '한국전통의 맥 100인전'이 3월부터 6월까지 총 6일간 오후 5시에 서울 전통공연에술진흥재단 전통공연창작마루 광무대에서 올려진다. 전통예술컨텐츠 레파토리 공연물로 3월 21일, 3월 30일, 4월 11일, 4월 27일, 5월 9일, 6월 29일에 열린다. 신진무용가, 중견무용가들의 전통춤에 대한 열정과 기량을 감상할 수 있는 현장이다. 봄향기 완연한 5월 공연은 9일 열리게 되는데, 첫 번째 무대는 이지현(국가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 전수자)이 선보이는 '통영기방입춤'이 문을 연다. 통영기방입춤은 통영권번에서 예기 교육을 위해 추던 기본무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통영 칼춤)의 예능보유자 엄옥자 선생님이 故 정순남 선생님께 사사받아 재구성한 작품이다. 쌍오리 사위, 겨드랑사위, 손춤 등 '승전무'의 춤사위와 유사하며, 아기자기하며 정제된 춤사위가 특징이다. 두 번째 무대는 오민경(춤집단 MIN 대표)이 '강선영류 태평무'를 선보인다. 국가무형유산 제92호 '태평무'는 강선영(1925-2016)선생에 의해 전해지면서 격조있는 무대예술로 발전 되었다. 태평무는 나라의 풍년과 태평성대를 축원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의젓하면서도 경쾌하고 가볍고도 절도 있게 몰아치는 발 디딤새가 신명, 기량의 과시가 돋보이는 춤으로, 정 중 동의 미적형식을 가진 완벽한 춤이라 할 수 있다. 음악에 있어서는 경기도당굿에서 행하여진 무속 장단에 바탕을 둔 낙궁, 터벌림, 올림채, 도살풀이, 자진도살풀이 가락으로 연주되고 있다. 네 번째 무대는 오수연(국가무형유산 제97호 '살풀이춤' 전수자)이 '이매방류 호남검무'를 선사한다. 이매방류 호남검무는 검을 놓고 어르는 동작부터 칼을 잡고 행하는 춤사위는 무거우면서도 간결하다. 칼을 쓰는 춤이지만 살벌함이 없이 평화롭고 유연한 동작으로 일관된 아름다운 춤이다. 다섯 번째 작품은 황혜영(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 '호남살풀이춤' 이수자)이 선보이는 호남살풀이춤이다. 호남살풀이춤은 우아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운 춤이라 할 수 있다. 깊이 가라앉는 호흡의 춤사위와 엇가락을 타는 긴 수건 한 자락에 한 많은 꿈을 실어 던져버렸다 다시 휘감아 허공에 뿌리면 한 폭의 난을 그린 듯 하며 학이 날아와 앉는 모양을 한다. 이 춤의 특징은 철학 속에 혼이 담긴 춤사위로 기방예인들의 무무(巫舞) 형태인 민속예능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맺고 풀어주는 가락에 실어내는 고운 선과 휘몰아 치는 춤사위로, 간결하면서도 시원스럽게 뿌려지는 긴 수건에 인간의 이중 구조적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는 정·중·동의 미학을 간직한 호남지방의 춤이다. 여섯 번째 작품은 김경은(국가무형유산 '승무' 이수자)이 선보이는 '한영숙-이애주류 승무'이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있는 승무는 그 정신과 구성으로 볼 때, 우리 민족의 역사적 몸짓을 바탕으로 그 골격이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 조선말 한성준 선생에 의해 독자적인 춤으로 정립된 승무의 춤사위 안에는 인간의 희로애락, 생장수장, 우주만물의 이치가 모두 담겨있다. ‘승’은 넓은 의미로 나 자신을 포함한 ‘온 중생’이라는 점에서, 승무는 결국 대승의 세계를 염원하는 ‘우리 모두의 춤’이 된다. 일곱 번째 작품은 이봉주(국가무형유산 '승전무' 전수자)가 선보이는 '엄옥자류 수건춤'이다. 엄옥자류 수건춤의 가장 큰 남해안 통영적 특성은 깊고 거친 호흡에 있다. 가벼운 수건 한 장으로 한을 풀어내며 신명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무겁게 툭 떨어지는 호흡, 가볍게 떨어지다 멈추는가 하면 다시 강하게 툭 떨어지는 호흡법은 영남(통영)춤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가볍고 매끈한 호흡이 아니라 답지저앙의 변형인 배김새를 이끌어 내는 강하고 깊은 호흡이야 말로 영남춤의 시작이자 완결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중력에 반하여 떠올리는 발디딤이 무거워 춤이 깊어지고, 거칠고 투박한 어깨짓에 따라 춤을 맺고 멈추고 풀어 남해안 통영지방의 해학적 한이 녹아내리는 과정을 표현하며, 분출하는 강력한 힘의 균형과 조화로 통영춤의 근원적 원형이라 할 수 있겠다. 여덟 번째 작품은 문진수가 '광대소고춤'을 선사한다. 광대 소고춤은 20세기 초 노르베르트 베버 독일 신부가 촬영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에 등장하는 소고춤의 기예와 타법을 발굴, 복원 및 재현하고, 재구성, 재창조한 작품이다. 이 기록영상이 나오기 전까지는 소고는 단순히 농악, 무용, 선소리 등에 등장하는 부수적인 공연요소로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광대 소고춤은 소고를 활용한 다양한 타법과 신체의 조화, 화려한 기교와 몸짓의 조화, 춤적 움직임을 극대화하여 독특한 춤사위로 표현한 특징을 지닌다. 문진수는 대한민국연희춤협회 회장, 국가무형유산 남사당, 발탈, 승무, 우도농악 이수자이다. 마지막 작품은 재인청예술단이 '이동안류 태평무'를 선사한다. '태평무'는 나라의 국태민안과 태평성대를 축원하는 춤이다. 이동안류 태평무는 재인청 전통을 따라 당상관의 관복을 입고 추는데, 바지춤의 장점이 드러나게 동작이 섬세하고 역동적이면서도 의식을 거행하는 제관(祭官) 같은 위엄과 격식을 갖춘 절제의 멋이 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구름 위를 걷듯 출렁이고, 살얼음을 깨뜨리지 않는 사뿐한 발디딤에 무심한 듯 위엄이 깃든 절제된 표정에서는 격조 있는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정주미(재인청춤전승보존회 회장), 이종진(재인청예술단 부단장), 성수희(재인청예술단원)가 선보인다. 한국전통예술협회 송미숙(진주교육대학교 교수)이사장은 이 시대의 가무악시리즈 Ⅱ-한국전통의 맥 100인전-류파별 춤전’ 공연을 통해 전통예술의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고 예술생태계의 숲을 일구는 백화제방을 위한 이음의 현장을 성황리에 진행하고 있다. 송미숙은 춤 역사의 시간을 함께 해온 한국전통문화유산에 대한 올곧은 받듬과 이음을 위해 60여년 동안 예인들에게 전통춤을 사사해왔다. 전통과 창작무용을 익혀 무용교육과 공연예술가로 활동해온 송미숙은 1994년 무용단을 결성하여 현재까지 1,000여회 넘게 전통춤 관련 기획, 연출, 예술감독 역할을 해왔다. 송이사장은 "’한국전통의 맥 100인전‘을 통해 전통춤의 방향성과 정체성을 찾아보고 다양한 측면에서 예술현장과 학술적 접근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알아가는 담론의 장을 펼치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한국전통예술협회는 2019년 창립 이후 전통예술과 인문학 콘텐츠를 바탕으로 인문사회, 문화예술, 전통예술 분야까지 새로운 지평을 넓혀오고 있다. 협회에서 정기적으로 발간하고 있는 학술지 '한국예술문화연구'는 문화예술 공론장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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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89)<br> 정경파 명인의 살풀이춤 춤사위살풀이춤 경기도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 살풀이춤'은 독특한 배경설화가 무복과 춤사위에 반영되어 있다. 예능보유자 정경파(鄭慶波)에 의하면 "어느 아버지가 병이 들어 약을 먹어도 낫지 않고 굿을 해도 안 낫고 백약이 무효라서 그의 외동 딸이 백일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백발할아버지가 내려와 너의 아버 지는 살이 너무 많이 끼었으니 흰색 옷고름에 흰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춤을 추고 수건을 던질 때 수건 날려 살(煞)을 풀어내면 살고 죽으면 죽을 것이니 죽는 순간을 못 보므로 상복(喪服)을 하라”고 했다. 화성재인청 살풀이춤이 두 개의 수건으로 이루어낸 배경설화속의 춤사위를 살펴보면 뒤에 놓여 진 수건 하나는 병든 아버지이고 상징하는 것이다. 살풀이춤은 일반적으로 민속음악 가운데 살풀이라는 남도음악 장단에 맞추어 추는 춤이며, 원래 무당들이 신을 접하기 위한 수단으로 추었던 춤인데, 훗날 광대나 기생들에 의해 교방예술로 발전되어 춤의 내용이 한층 예술적으로 다듬어졌고 아름다운 기법과 형식으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 고운 머리에 비녀를 꽂고 흰저고리와 치마에 버선, 그리고 옷고름이 늘어진 의상과 하얀수건을 쥐고 추는 것이 특징이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승무·살풀이춤은 이동안-정경파-김복련으로 이어진다. 1991년 정경파가 보유자로 지정돼 맥을 이어오다 2000년 작고했고 그에게서 재인청 기본무, 승무·살풀이춤, 진쇠무, 신칼대신무 등의 기예를 20여 년간 사사했던 김복연이 2002년 보유자로 지정돼 현재에 이른다. 정경파 이 춤의 보유자였던 정경파는 본래 충북 옥천 태생이지만 그의 선친을 따라 진주에서 살았는데, 진주권번에서 소리를 배워 오다가 한성준(韓成俊)·박성준에게서 춤과 창을 사사받았다. 그 뒤 화성재인청 출신인 김인호(金仁鎬)에게서 춤을 배워 당시 춤의 명인으로 이름이 나있던 이동안의 영향을 받아 승무·살풀이춤·타령·굿거리·검무·농악·신칼대신무 등을 사사받았다. 평생 화령전에서 지내면서 화성 재인청의 춤을 전파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살풀이춤은 화려한 기교를 절제한 단아함이 매력이다. 현재 이매방류(호남류) 승무·살풀이의 춤동작이 재고 경쾌한데 반해 경기도의 승무 살풀이는 호흡이 길고 밑으로 깔리는 가락이어서 다소 난해하지만 근엄한 우아미의 깊이는 중후하다. 옥당(玉室) 정경파(鄭慶波) 1991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 살풀이춤' 1대 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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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87)<br> 정인삼 명인의 '신칼대신무' 춤사위신칼대신무 신칼대신무는 무속장단과 巫具를 활용한 재인의 춤으로, 장단과 움직임의 법도 있는 만남을 잘 보여주는 춤이다. 구한말 화성재인청에서 가르친 50여 가지의 전통춤 가운데 현재 승무살풀이, 신칼대신무, 진쇠춤(한량무) 등이 전수되고 있다. 정인삼 선생은 신칼대신무와 진쇠춤의 명맥을 잇는 춤꾼이다. 계보를 살피면 용인을 본거지로 활동한 예인 김인호 선생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에 화성재인청 최고책임자인 대방(大房)의 직을 맡았던 당대 최고의 명인이었다. 김인호 선생은 이동안 선생에게 30여 가지 전통춤과 장단을 전수했으며 이동안 선생은 제자 정인삼 선생에게 경기도 전통무용 신칼대신무와 진쇠춤을 가르쳤다. 정인삼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6호 '경기고깔소고춤'(2015년 지정)보유자다. 화성재인청 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용인 출신 명인 김인호 선생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김인호-이동안-정인삼으로 이어지는 한국 전통춤의 본류와 용인무형문화예술의 원형을 재발견하고 보존·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김인호 선생은 이동안 선생에게 30여 가지 전통춤과 장단을 전수한 스승이며, 화성재인청 대방의 직을 이은 이동안 선생은 제자 정인삼 선생에게 직접 경기도 전통무용 신칼대신무와 진쇠춤을 가르쳤다. 정인삼 선생은 지난 1974년부터 한국민속촌 농악단장을 맡아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최고 기량과 신명을 선보이는 전통 판굿을 공연하고 있다. 또 호남지방 소고춤을 집대성해 정인삼류의 소고춤을 완성했다. 1974년 10월 3일 경기도 용인 한국민속촌이 개관하면서 민속촌농악단장으로 유명한 정인삼은 조선 후기 예능인 기구인 화성재인청 출신 이동안 선생과 그의 제자 정경파 선생으로부터 춤을 전수받았다. 화성재인청은 구한말 8도 재인청을 총괄하는 조직이었다. 임금이 계시는 곳에서 큰 행사가 있거나, 외국 사신이 올 때 놀이 주관을 화성재인청에서 했다. 화성재인청은 구한말 경기권 내 예인 관할 기관으로 악기 연구와 춤 등을 가르친 예술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때 용인을 본거지로 활동한 예인 김인호 선생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에 화성재인청 최고책임자인 대방직을 맡았던 최고의 명인이었다. 정인삼 약력 1999년 사단법인 한국농악보존협회 창립 (사)한국농악보존협회 이사장 한국민속촌 농악단 석좌 박금슬 춤 보존회 '금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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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연희춤협회 문진수 회장,<br> "각 지부 지회 연희춤 공연에 집중한다"2022년에 대한민국 연희춤협회(한국 연희춤협회)가 창립되었다. 전국 20여 개 지역에 지부와 지회가 개설되었고, 얼마 전 캐나다에도 지회가 만들어졌다. 연희춤을 바탕으로 연희춤꾼이 펼치는 꾼들이 모여서 각 지역 연희춤을 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 연희춤협회 문진수 회장을 지난 2월 '대한민국 전통춤문화제'가 개최되는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만나게 되었다. Q. 지난해 대한민국연희춤협회 전승 활동은 A. 2023년은 전통예술과 연희를 새롭게 해석하며 품격있는 춤과 융합하여 독립적이고 예술적인 가치로 재창조하고 연희춤의 지경을 더욱 확장하여, 다양한 시도를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선보이며 위상을 높이는 시간이었습니다. 2023년 한 해동안 대한민국연희춤협회의 국, 내외 각 지부, 지회에서도 활발한 공연과 전승활동을 통하여 연희춤의 예술적, 독보적 가치를 선보이고 이를 통하여 전통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연희춤의 가능성을 보여준 몇 개의 연희춤 공연과 전통춤의 깊은 경지를 다시 한번 실감하였던 몇 개의 공연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와 기억에 남습니다. 먼저 아시아 1인극 축제에서 선보인 검사 위의 백사(뫼비우스)는 12발 상모춤의 전통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시대정신과 민중 저항성을 반영한 스토리텔링과 전통춤의 아름다움, 역동적인 12발의 기예를 융합하여 하나의 독립적인 공연 예술작품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으로, 민중의 소리를 듣고 예술을 통한 관객과의 소통, 공감을 의도한 작품입니다. 또한 계룡산 국제춤축제에서 초연한 산왕대신기는 뫼비우스의 스토리텔링에 이어 12발상모로 대변되는 두 마리 용과 계룡산의 산왕대신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12발 상모 연희, 신칼대신무 등의 춤, 전통 비나리, 재담을 통해 극적, 예술적으로 풀어가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희적 스토리와 함께 관객과 소통하면서 부정한 것을 정화하며, 인간의 삶과 희망을 대변하여 하늘로 전하고 기원하는 진정한 제(祭)와 굿의 의미를 실연(實演)하여 자연과 삶 속에 녹여내고자 하는 의도를 담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작품입니다. 전통춤으로는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소리꾼 김보라 선생님과의 콜라보 공연이였던 소고 입춤과 발탈 보유자이신 박정임 선생님의 구음과 함께했던 국립국악원 기획공연 [일이관지_조선춤방] 이동안류 기본무와 팔박수건춤이 있었습니다. 소고 입춤은 소고 연희의 전통적인 고증과 연구를 바탕으로 재해석한 소고춤과 문진수류의 입춤을 엮어 재해석, 재창작한 작품으로 다른 류의 소고춤에서는 볼 수 없는 연희춤의 차별성과 품격을 춤과 소고연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박정임선생님과의 국립국악원 공연 일이관지(一以貫之)를 통해서 故 이동안 선생님과 박정임 선생님의 깊은 예술 세계에 경탄하며, 창작과 재창조를 위해서는 전통에 대한 끊임없는 정진을 통한 깊은 고민의 과정을 토대로 해야 함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연희 분야를 현대적 수용을 위해 재해석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무대를 보여주고 있는 문진수 회장은 남사당·승무·발탈·영광우도농악까지 4개의 무형문화재 이수자이며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북, 장구) 전수자다. 그는 30여 년간 전통예술을 연마하면서 무용학 박사까지 마쳤고, 최우수 박사학위 논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Q. 지난 해 문진수 회장님 개인적 전승활동은 A. 작년에는 코로나도 주춤해서인지 여기 저기 무대에 서는 날이 많아지더군요. 2023.01.27. 코리아그라피 우리소리 추어지다 (서울남산국악당)_ 전통을 복원한 소고춤, 전통입춤, 전통구음의 현대적 해석과 콜라보 2023.03.22 인천 서구립풍물단 심사(인천 서구립)_ 풍물단원 심사 2023.05.03. 전문직업인에게 듣는 진로이야기(의령문화원)_전통연희 진로와 방향 2023.05.11. 2023 정읍무형문화재 합동발표회(동학농민혁명기념제 황토현 특설무대)_ 정읍무형문화재 17호 악기장 전수자 2023.05.20. 통영오광대 정기공연_문진수류 12발 상모춤 초청공연 2023.06.05. 대한민국연희춤협회 정기모임 및 지부, 지회장 임명장(추가) 수여식 2023.06.08. 찾아가는 문화재 발탈 공연(오산)_채상설장구 초청공연 2023.06.10. 김복희교수 대안적 현대박물관학 네트워킹 파티_ 문진수류 설장구춤 초청공연 2023.06.14. 홍주향교 달빛타기_ 문진수류 12발 상모춤 초청공연 2023.06.18. 연희춤꾼 더 문진수의 소고춤 연수회_대한민국연희춤협회 2023.06.24.~6.25. ASIA 1인극제 거창 2023_ 검사위에 백사, 채상설장구 초청공연 2023.06.30. 찾아가는 문화재 공연 발탈(수원)_채상설장구 초청공연 2023.07.15.~16. 대한민국연희춤협회 하계연수회 2023.8.12. 자계예술촌 제20회 산골공연 예술잔치_ 문진수류 12발상모춤 초청공연 2023.08.19. 2023년 국가무형문화제 제3호 남사당놀이 공개행사(운현궁) 2023.08.27. 진해 전국국악대전 풍물심사(진해문화예술회관) 2023.09.15. ART FAIR HONGJU(아리랑뮤직)_문진수류 12발상모춤, 처용무 초청공연 2023.09.16. 대전상설공연(우암사적공원)_ 문진수류 버나놀이(춤), 문진수류 12발상모춤공연 2023.09.17. 2023 세계무형유산 VIRTUOSO_ 문진수류 버나놀이(춤) 2023.09.23. 대전상설공연(대청댐)_ 문진수류 버나놀이(춤), 문진수류 12발상모춤공연 2023.09.23. 아리랑뮤직 음악회_ 문진수류 설장구춤 초청공연 2023.09.24. 2023 대한민국농악축제(강원감영)_ 문진수류 12발상모춤 초청공연 2023.09.26 광양시 농악경연대회 심사 및 축하공연(광양시청)_채상설장구춤 공연 2023.10.09 국립세계문자박물관 한글날 경축행사(국립세계문자박물관)_남사당 덧뵈기, 열두발상모춤, 버나놀이 공연 2023.10.11. 아리랑뮤직 음악회(홍성)_채상설장구춤 초청공연 2023.10.14 오대산 문화축전_한강생명시원제(월정사)_신칼대신무, 버나놀이 초청공연 2023.10.19 사)한국국악협회 서울특별시 광진구지부 정기공연(광진나루 아트센터 대극장)_열두발상모춤 초청공연 2023.10.25. 일이관지 조선춤방(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_이동안류 기본무, 팔박수건춤(박정임 구음) 2023.10.21.~10.22. 제28회 계룡산국제춤축제 산왕대신기_문진수류 덧뵈기춤, 소리, 신칼대신무, 12발상모춤, 버나놀이 공연 2023.10.28.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공개행사_문진수류 채상설장구 2023.10.29. 한국베트남 전통문화예술축제(인천시청)_ 이동안류 신칼대신무 초청공연 2023.11.04. 개천사 비자나무숲 음악회(개천사)_버나놀이 2023.11.15. 배꼽마을 치유 축제(청성 장연리)_버나놀이 2023.11.18. 남사당놀이보유자 考박용태선생님 2주기 추모공연(대전 예맥아트홀)_ 남사당 덧뵈기 전과장 시연 및 이동안류 신칼대신무 공연 2023.11.25. 대전1인극 축제_ 화엄무변(문진수류 버나놀이(춤)), 문진수류 12발상모춤 초청공연 2023.12.12. 제44회 정명자 춤의 세계(한국문화재단 민속극장 풍류)_광대소고춤, 열두발상모춤 공연 2023.12.24 .오늘도 X-MAS는 춤춘다(고래문화재단)_버나놀이와 열두발 상모춤 공연 2023.12.27. 남사당과 함께하는 덩쿵~ 흥겨운 버나 놀이_버나놀이와 재담 공연 Q. 대한민국연희춤협회 소개해주세요. A. 2022년 대한민국연희춤협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연희춤에 뜻을 같이하는 국내 및 해외 회원과 함께 2023년 협회창립모임을 통해 국내 및 해외 지부지회를 공식 출범하고 활발한 전승과 보전을 위한 공식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각 지부, 지회는 가(歌), 무(舞), 악(樂), 기예(技藝) 등 다양한 전통연희를 전승하고 활발한 공연과 교육활동을 벌이고 있는 전통연희 전수자, 이수자, 무용가, 문화운동가 등 전통연희와 예술 분야의 재원으로 풍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회장 문진수, 사무국장 이지원을 비롯하여 국내외 20여 개의 지부, 지회로 활동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Q. 지난해 성과는 A. 연희춤을 통한 새로운 시도를 위해 연구한 작품들이 감사하게도 평단과 관객의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연희를 보시는 관객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전통연희를 연구하는 석학과 문화운동가들에게 연희춤의 훌륭한 가능성과 가치를 선보이며 받았던 좋은 에너지를 바탕으로 전통의 재해석 재창조한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환원하는 예술가로서의 본연의 작업에 정진할 수 있었던 뜻깊은 한해였습니다. 이러한 연희춤을 통해 전통연희를 재해석하고 창조하는 데 뜻을 모으며, 이를 구체적인 전승 활동으로 구현하기 위해 2023년에 연희지도사 및 무형문화유산 지도사 등 문화예술 교육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Q. 올해 역점 사업은 A. 연희지도사 및 무형문화유산 지도사에 적합한 최적의 교육과정을 구현하기 위한 전승교육과 전승지도사의 육성에 초점을 맞추어 운영하며, 각 지부 지회의 연희춤 공연과 전승 활동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탤 예정입니다. 또한 개인적인 전승 활동과 연희춤에 끊임없이 정진하며, 새로운 시도를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과 만나고 소통하며 연희춤의 무변(無邊)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또 한번 새롭게 조명하는 2024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Q. 국악계에 하고 싶은 말 A.문화의 힘이 곧 국력이자 국가의 100년 자산이 되는 글로벌문화 시대입니다, 전통문화의 흥과 멋, 예술적인 가치와 정신적인 철학을 토대로 현대적 삶에 이를 새롭게 녹여내어 이상적인 가치로 풀어내는 예술가이자 문화운동가로서의 의식있는 연희꾼들의 뜨거운 실천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연희꾼 스스로의 예술적 정진, 창조적인 도전과 더불어 전통예술에 대한 관심과 관리, 전승 교육을 위한 시스템과 재정적 지원 등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전통예술에 대한 지원을 통해 예술로서 창조하고 관객과 소통하는 상생 에너지가 재생산되어 다시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며, 예술을 매개로한 정신적 부흥으로 흥과 멋, 정이 흐드러지는 모든 공동체의 기운생동(起運生動), 상생(相生)의 문화부흥 시대를 기대합니다. 문진수 -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 이수자 -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이수자 -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5호 승무 이수자 -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7호 영광우도농악 이수자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북, 장구) 전수자 - 한양대학교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 - 사단법인 광양버꾸놀이보존협회 부이사장 - 사단법인 국가무형문화재 남사당놀이보존회 이사 - 사단법인 남사당 대전지회 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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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춤의 맥과 계보, 6일간 펼친다문화재 중심 시각에서 벗어나 확장된 전통춤 계보를 조망한다. 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은 기악, 성악, 무용을 아우르는 전통예인들의 무대로 연중 진행한 기획공연 <일이관지(一以貫之): 예술로 꿰뚫다>의 올해 마지막 기획으로 ‘조선춤방’을 선보인다. 오는 10월 17일(화)~19일(목), 10월 24일(화)~26일(목)까지 6일간 풍류사랑방에서 열리는 ‘조선춤방’은 개화기 이후 1960년대까지 권번, 사설국악원, 고전무용학원을 중심으로 전승된 근현대 전통춤의 맥과 계보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일제강점기 관기 제도가 사라지자, 새롭게 만들어진 권번(券番)에서 예기(藝妓) 또는 사범으로 지방마다 이름난 명무(名舞)들이 있었고, 이들은 해방 후 사설국악원으로, 한국전쟁 후에는 고전무용학원을 열어 춤의 명맥을 이어갔다. 이들은 춤만 잘 춘 것이 아니라 악가무에 모두 능한 명인들이었다. <일이관지-조선춤방>은 그들의 이름에 ‘춤방’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남북한을 아우르는 17개 춤방의 전승 레퍼토리 34개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남북한을 아우르는 17개 춤방의 34개 작품이 6일간 무대에 올라간다. 반주는 전통음악그룹 판(음악감독: 유인상)이 맡는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특이한 사항은 연습실에서는 추어지지만 무대에는 오르지 않았던 각 춤방의 기본무를 작품으로 올린다는 점이다. 과거에 춤을 배우던 방식대로 선대 사범의 춤에서 특징적인 발디딤과 동작을 추려 춤사범 혹은 악사의 구음과 장구에 맞추어 기본무를 작품처럼 선보인다. 또한 권번과 사설국악원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검무>, <승무>, <수건춤>의 다양성과 진면목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번 기획에 참여한 관계자는 "문화재 중심 시각에서 벗어나면 훨씬 더 풍성한 우리의 춤 자산이 드러나며, 그 맥락에 초점을 두고 그 속에서 개별 춤들을 바라보면 우리 춤의 정신과 가치가 새롭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일자 대표춤방 춤사범 프로그램 출연자 10/17(화) 영남 김수악춤방 김경란 굿거리 초무 (춤) 김부경, 장인숙 2. 구음검무 (춤) 김미선, 이상연 3. 진주교방굿거리춤 (춤) 김경란 정순남춤방 엄옥자 4. 통영기방입춤 (장단) 엄옥자 (춤) 변지연, 이봉주, 김현애 5. 통영 승전무(칼춤, 북춤) (칼춤) 박정화, 이경림 (북춤) 변지연, 이봉주, 신정화, 김현애 10/18(수) 중부 하규일춤방 춘앵전 (춤) 김혜자 (반주) 정악단 김천흥춤방 인남순 2. 기본무 (장단) 인남순 (춤) 변상아, 김재희, 조은서 3. 승무 (춤) 이하경, 윤이재 4. 살풀이춤 (춤) 인남순 심화영춤방 이애리 5. 손춤 (춤) 이애리, 배소정, 최승원, 하세영 6. 승무 (춤) 이애리 10/19(목) 호남 조갑녀춤방 정명희 승무 (춤) 정명희 남원검무 (춤) 고연세, 곽시내, 김윤희, 이민선 3. 민살풀이춤 (춤) 정명희 박금슬춤방 김광숙 4. 기본무 (장단) 김광숙 (춤) 배형숙, 이지현, 임유진, 이윤하 5. 바라승무 (춤) 국수호특 6. 예기무 (춤) 김광숙 10/24(화) 영남 정소산춤방 백년욱 달구벌 검무 (춤) 최화진, 곽민정, 한혜원, 김가현 수건춤 (춤) 백년욱 기본무 (장단) 백년욱 (춤) 최화진, 곽민정, 한혜원 박지홍춤방 권명화 4. 입춤 (장단) 권명화 (춤) 조은희, 권예림 5. 소고춤 (춤) 장유경 6. 살풀이춤 (춤) 조은희 10/25(수) 혼합 이말량춤방 1. 기본춤, 가야금병창 (춤) 이지영특(장단, 구음) 최은경특 (가야금병창) 이지영, 최은경 이동안춤방 박정임 2. 팔박수건춤 (장단) 박정임특(춤) 문진수 장월중선춤방 주영희 3. 살풀이춤, 선비춤 (수건춤) 주영희 (선비춤) 김도훈 김애정춤방 4. 살풀이춤 (춤) 장순향 장홍심춤방 이성자 5. 바라승무 (춤) 이성자특(부분참여), 송미숙 장금도춤방 6. 민살풀이춤 (춤) 서정숙 10/26(목) 이북-인천 민천식춤방 김나연 1. 기본무 (장단) 김나연 (춤) 김소연, 염예주, 여혜연 2. 화관무 (춤) 차지언 3. 해주 수건춤 (춤) 김나연, 차지언 (구음) 최경만특 양소운춤방 4. 성인인상무(승무) (춤) 이종호, 박일흥특 5. 해주검무 (춤) 차재숙, 정미경, 장국진, 이예솔 (반주) 차민선(장구), 차원선(피리), 윤석만(대금), 안혜진(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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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대 춤꾼이 만든 '2023 춤&판 고무신춤축제'서울남산국악당과의 공동주최, 한국춤협회가 주최, 주관하는 ‘2023 춤&판 고무신춤축제’가 14일부터 23일까지 서울아트센터 도암홀과 서울남산국악당에서 개최된다.‘춤&판 고무신춤축제’는 명무들의 전통춤 레파토리를 독무로 볼 수 있는 ‘춤&판(춤앤판)’과 수도권 대학의 한국무용 단체들이 전통춤부터 한국창작춤까지 다양한 작품을 펼치는 ‘고무신춤축제’로 이루어진 (사)한국춤협회의 대표 공연축제이다. 2011년부터 시작된 ‘춤&판 고무신춤축제’는 차세대부터 중견 무용가, 원로 무용가까지 전 세대 춤꾼들의 다양한 춤사위를 볼 수 있는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무신춤축제’는 수도권의 14개의 대학이 참가한다. 공연은 9월 14일부터 15일까지 양일간 서울아트센터 도암홀에서 오후 7시에 시작된다. 14일에는 고무신 프로젝트팀 컴바인의 '합쳐진 하나의 그리드' 공연이 펼쳐진다. 타인과 마음을 나누는 모습을 그리는 이야기를 담은 창작작품으로 참가 무용수 14명이 공동으로 안무했다. 이어 국민대 '신태평무-비손', 단국대 '울림의 色', 동덕여대 '2023_오래된 R', 상명대 '강선영류 태평무', 한예종 무용원 실기과 '고요한 순환 中 진여에서' 한국체대 '오늘의 의식', 한양대(ERICA) ‘박제(剝製)’ 공연된다.15일에는 고무신 프로젝트팀 컴바인의 '합쳐진 하나의 그리드'가 한 번 더 무대에 오른다. 이어 경희대 '燔我웃', 서경대 '종이달', 성신여대 '23'soul', 숙명여대 '한영숙제 정재만류 승무', 한예종 전통예술원 '춘앵전', 한성대 '향운 香雲', 한양대(서울) ‘숨 쉬는 봄 ver.3'가 공연된다.한국춤협회는 '춤&판 고무신춤축제'가 마무리된 후 춤&판에 참여했던 전통춤꾼 무용가들과 고무신춤축제에 했던 대학생 무용수들이 함께 하는 좌담회를 연다. '춤&판(춤앤판)'은 20~23일 서울남산국악당에서 공연된다. 20일에는 ▲김유나 '교방굿거리춤' ▲김현태 '선살풀이춤' ▲박은진 '이동안류 진쇠춤' ▲박정한 '정은혜류 대바라춤' ▲손미정 '여울(최현류 산조춤)' ▲유혜진 '강선영류 즉흥무' ▲황규선 '강선영류 태평무'가 선보인다. 21일에는 ▲강연진 '경기검무' ▲김진희 '박병천류 진도북춤' ▲김혜영 '한영숙류 살풀이춤' ▲박연주 '조갑녀류 민살풀이춤' ▲양서윤 '한영숙류 태평무' ▲이미희 '정재만류 허튼춤' ▲장인숙 '김경란작 승무'가 공연된다.22일에는 ▲김선영 '강선영류 태평무' ▲김일환 '신관철류 수건춤' ▲김지영 '춤본Ⅱ' ▲박시종 '진주 교방굿거리춤' ▲임성옥 '살풀이춤_홀연' ▲정관영 '평채 소고춤' ▲정유진 '겹채 장고춤'이 공연된다. 축제의 마지막날인 23일 한국춤협회 초대이사장인 김매자, 명예이사장인 임학선·윤덕경·백현순·이미영, 현 이사장인 윤수미의 무대가 한 자리에서 펼쳐진다. 본 축제의 총예술감독인 한국춤협회 윤수미 이사장은 "한국춤은 한국문화의 세계화에 있어 우리가 지키고 전승하며 동시에 발전시켜야 할 고유한 문화적 자산이다.”라고 전하며, "이번 2023 춤&판 고무신춤축제를 통해 한국춤의 전통을 잇고, 새로운 한국춤 콘텐츠를 개발하여 한국춤의 전통과 미래를 함께 아우르는 춤축제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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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1)<br>김진홍 명인의 '동래한량춤' 춤사위동래한량무 동래한량춤은 동래의 지역색이 강하고, 독특한 춤가락이 가미된 남성춤이다. 이 춤은 예로부터 소문난 명무들이 많아서 춤의 고장으로 불리우는 동래지역의 한량들이 추었던 춤이다. 전통적 극형식의 한량무는 경망과 기품, 진지함과 해학성을 넘나들며 해학과 풍자를 담아낸다. 능수능란한 자연스런 몸의 흐름에 따라서 흥과 한을 표출하여 춤의 완성도를 극대화 한다. 한국 남성춤만이 가지는 역동성과 멋이 담긴 춤사위가 지역마다 추는 형태는 조금씩 다르다. 경남지역 진주교방 계열의 김덕명류, 서울경기 지역 한성준류, 김인호 계열의 이동안류, 김덕순 계열의 김숙자류를 들 수 있다. '문장원류 한량춤'은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고, 김진홍이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동래한량무는 동래야류와 동래학춤이 근간이 되어 만들어 졌으며, 다른 지역 한량무보다 풍류의 본질인 놀이적 요소와 자연친화력 요소가 내재된 자유로운 유희성을 담보하고 있다. 김진홍의 '동래한량춤'은 경상도 지역 특유의 배김사위를 구사하는 덧뵈기춤이 특징이다. 이매방의 초기 제자인 김진홍은 1935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다. 어린시절 부모를 따라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서 메이지유신의 소산인 신문명·신문화가 꽃피었던 오사카의 도시문화 속에서 서구식 예술장르를 접한다. 1940년대 초반 귀국하여 부산 범일동에 안착, 6.25 전쟁이후 부산을 고향 삼아 정착한다. 이매방과 사승관계를 맺고 전통춤을 사사받는다. 한편 '동래야류'의 예능보유자 문장원 문하에서 '덧뵈기춤'과 '한량무'를 배웠다. 김진홍의 동래한량무는 유장미와 풍류적 의미가 짙게 배인 덧배기 춤사위가 일품이다. 특히 춤사위의 호흡이 맺고 풀리는 원리를 가지면서 그 안에서 자유로운 즉흥성이 조화롭게 순환된다. 무대 형식보다는 마당에서 더욱 돋보이는 춤사위를 펼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김진홍(1935~ ) 1935년 경남 하동 출생 1951년 (부산)무용콩클대회 '남방춤' 입상(부산 동구 범일동 삼일극장) 이매방에게 승무 사사 이동안에게 태평무,진쇠춤 사사 1987년 승무 이수자 1998년 이매방류 살풀이 이수자 2006년 동래한량춤 예능보유자 후보 선정 2010년 부산시무형문화재 제14호 동래한량춤' 예능보유자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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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국의 지역춤, 부산·경남지역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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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한량춤'의 명무, 김진홍"춤은 칼과 같아서 하루만 안 갈아도 녹이 스는거여."(이매방) 김진홍이 평생 등에 비수처럼 꼽고 살았던 좌우명이다.30대 한창 젊을 때 진주살풀이와 진주교방굿거리, 진주검무로 명무가를 일궜던 김수악 명인에게서도 예술의 경지가 어디까지인지 깨닫게 된다. "자네는 음악과 춤이 무엇인지 아는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절이 인생의 희로애락이어서 그것이 바로 춤이라네."(김수악) 스승의 물음에 딱히 답을 못했던 기억이 선하다. 스승의 선문답 같은 화두를 지금도 놓치지 않았다.1976년(42세) 부산민속예술보존회에 입회하여 만난 김석출(동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의 사촌동생 김계향은 또 다른 춤의 세계를 열어준다. 당시 동래학춤의 입장단(구음)을 하던 김계향에게서 굿공부를 하면서 지전춤, 반야용선춤, 꽃맞이춤 등 춤의 뿌리가 되는 굿춤(무무)을 배웠다. 잠깐 경기 재인청 재인(才人) 이동안으로부터도 태평무와 진쇠춤도 배웠다.1983년 49세 때 제9회 전주대사습에서 승무로 무용부문 장원을 한다. "춤이라 하는 것은 테크닉을 많이 넣으면 춤추는 사람한테 여유가 없어지는 거라예. 테크닉 많이 넣고 잔가락 많이 넣고 추는 춤은 그냥 춤일 뿐이지예. 빨리 많이 추는 것보다 시간이 걸리드래도 한 동작 바르게 추는 춤은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합니더."춤은 끝까지 감상하고 난 뒤에도 여운이 남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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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꾼 이동안, 나의 스승 이동안운학 이동안 선생. 한 때 전국을 떠돌며 온갖 기예로 명성을 떨친 재인이다. 선생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예인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동안 명인은 재인청의 예맥을 이어 내린 세기의 광대로 김인호의 제자다. 명창 이동백과 근대무용의 아버지 한성준의 증언에 따르면 김인호는 구한말 순종과 함께 대청마루에서 놀았던 광대 중의 광대였던 인물이다. 이동안 선생의 집안은 세습광대의 집안으로 할아버지(이화실)는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런 광대의 가문으로 맥을 이어온 이동안 선생의 집안이었지만, 선생의 아버지인 이재학은 이동안 선생에게 어렸을 때부터 사물(꽹과리, 북, 징, 장고)이나 젓대(대금), 피리를 잡게 하는 대신 서당에 보내 글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선생은 집에서는 글방 간다고 나와서 글공부는 안하고 이 동네 저 동네 인근 마을에까지 남사당 패거리들의 굿판을 따라다니며 구경하는데 정신을 빼앗겼다. 급기야 선생은 글방에 간다고 집에서 메고 온 책보를 뒷산 소나무에 걸어놓고 김석철 광대를 따라나섰다. 결국 선생은 남사당패를 따라 황해도 황주땅까지 간다. 14세 소년 이동안은 그렇게 끼를 주체할 수가 없어 방랑의 길을 시작했다. 선생이 남사당패에 들어 간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어느 날 황해 장터에 아버지 이재학이 나타났다. 아버지에게 이끌려 화성 집으로 돌아온 선생은 두 살 위인 최연화라는 처녀와 결혼을 한다. 그때 선생의 나이가 14세였는데 신부보다는 소리와 어름타고 땅재주 넘는 모습만이 눈 앞에 어른거려 결혼 4년 만에 집을 다시 뛰쳐 나온다. 선생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방황 끝에 광무대에 취직 이곳에서 재인청의 춤 선생인 . 김인호선생으로부터 팔박기본무.태평무.진쇠춤.엇중몰이신칼대신무등 30여 종 춤을 배웠다. 발탈로 국가무형문화재 기예능 인정을 받은 선생에게는 춤을 배우는 제자들이 그리 몰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춤으로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한 것이 가장 한스런 일이다. 발탈의 맥이 끊기지 않기 위해 받은 것이지만. ”(이동안) 나는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재인청 춤의 정수인 태평무를 전수받았다. 이동안 선생은 정주미에게 ‘태평무 이수증’을 수여하고 재인청 본류의 장단이 담긴 ‘태평무’음악을 연주녹음하여 재인청 '이동안류 태평무’의 본류를 지키도록 전수를 해주셨다. "나는 춤꾼이다. 우리 춤에도 이른바 여러 유파가 있어서 굳이 유파 속에 나를 넣는다면 ‘재인청’이라는 유파의 춤꾼이다. 그런데 재인청은 한국무용사의 입장에서는 결코 유파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재인청은 하나의 유파인데 유파가 아니라는 얘기다."(정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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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56) <br> 이동안 명인의 '재인청 이동안류 태평무 춤사위이동안류 태평무 격조와 품격의 아름다움이 절도 있게 드러나는 춤이다.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으면서도 구름 위를 걷듯 출렁이면서 살얼음을 깨뜨리지 않는 사뿐한 디딤은 압권이다. 여기에 긴 한삼자락을 펼치고 뿌려 거둬들이는 팔사위와 의식을 거행하는 제관(祭官) 같은 위엄이 깃든, 그러면서도 무심한 듯한 표정은 절제의 멋을 더해 준다. 장단으로는 긴 호흡을 가다듬는 춤의 첫 장면에서는 ‘길군악’ 음악을 뒤집어 ‘낙궁’이라 부르는 장단으로 시작한다. 구음이 들어가는 행차 걸음으로 의식무로서의 분위기를 잡는다. 부정놀이 장면에서는 24박을 한 장단으로 엮어 제관의 의식처럼 사방을 다니며 인사로 예를 다하는 춤을 춘다. 반서림(터벌림)에서는 5박 x 5박을 한 장단으로 하여 홑박의 묘미인 밝고 경쾌함이 나타나며 ‘흥’의 감정으로 리드미컬한 발동작과 팔사위로 짜임새를 만든다. 엇모리로 넘어오면서 타악기로만 반주하는 음악이 10박을 한 장단으로 하여 기악과 구음이 들어와 떠들썩하게 흥청거리고 비틀거리고 고뇌하며, 서민적인 정서를 엮어 고뇌가 깃들어 있는 관과 민을 아우르는 마음이 드러난다. 갑자기 번개치는 올림채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장구와 꽹과리 음악으로 몰아치며 춤이 잘게 쪼개어지고 급박한 다이나믹함으로 숨 막히게도 하지만 결코 위엄을 잃지 않는 속도감 있는 역전의 분위기를 만든다. 잦은몰이 일환인 경상도 엇굿거리, 넘김채, 겹마치기장단이 이어질 땐 급하면서도 질서와 규범이 있는 발동작이 이어지는데, 땅을 꾹꾹 디디는 발놀림이 화려하다. 열정과 신명이 솟는가 하면 넉넉하고 편안한 분위기와 생기 있고 발랄한 분위기가 이어지는데, 하늘을 향하여 한껏 펼쳐지는 한삼은 땅과 하늘이 하나 되듯 연출되며 태평성대를 느끼게 한다. 위의 요소들은 여느 태평무와는 다르게 이동안 선생의 태평무만이 갖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래서 이동안 태평무는 민속무의 대표적 두 줄기인 승무와 살풀이춤 못지않은 극적 요소를 갖춘 춤으로 인정받는다.(재인청춤보존회장 정주미) 이동안(1906-1995) 1920 광무대 생활 시작. 태평무, 진쇠춤 등 공연 1927 일본 전역 순회공연 (태평무, 진쇠춤) 1929 대동가극단의 임방울, 이화중선 함께 중국 순회공연 1983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예능보유자로 지정 1992 한국명인전 (엇중몰이신칼대신무) 1994 이동안 전통무용 발표회 (태평무, 진쇠춤, 엇중몰이신칼대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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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재인청의 맥을 이은 조선의 마지막 춤꾼, 이동안 명인운학(雲鶴) 이동안(1906~1995)은 경기도 화성이 낳은 재인청의 춤꾼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인이다.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고 전통문화의 기틀을 세우는데 기여했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화성 재인청의 최고 자리인 도대방에 올랐던 그는 광무대(光武薹)에서 공연 생활을 하게 되면서 경기재인청 출신인 춤과 장단의 명인 김인호, 줄타기의 명인 김관보, 발탈과 재담의 명인 박춘재, 남도소리의 명인 조진영, 대금 피리 해금의 명인 장점보, 태평소의 명인 방태진 등으로부터 각종 기예를 익혔다. 당대 최고의 명인들로부터 배운 기예는 이후 이동안이 경기재인청 춤의 전승자로, 줄타기 명인, 발탈 보유자로서 탁월한 예능인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화성재인청이 1922년 폐지되면서 이동안 선생은 마지막 도대방으로 기록된다. 이동안의 가계는 대대로 무업(巫業)을 주업으로 하던 경기재인청의 재인(才人)들이었다. 이동안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 137번지에서 아버지 이재학과 어머니 해주 오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해금 전문가, 조부 이하실은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다. 작은 할아버지 이창실은 줄타기 명인으로, 친가와 외가 모두 최고의 재인들이라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재인의 피를 물려받고 민속예술의 환경에서 자라났다. 재인청춤전승보존회 정주미 회장은 "한성준이 승무의 한영숙과 태평무의 강선영이라는 인간문화재 제자를 배출하면서 문화예술계의 주목과 인정을 받는 반면, 전통춤의 원형을 간직한 재인청 춤의 대가인 이동안은 무형문화재 중심으로 춤이 주목받고 평가되는 세태 속에서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춤이 아닌 발탈로 보유자가 된 이동안이 "내가 안하면 끊긴다고 해서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지만 사실 나는 춤꾼이지 발탈 재주꾼은 아니다”라고 한탄했다. 이동안에 대한 올바른 재평가는 그가 태어난 화성시에서부터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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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 1양산학춤은 2014년과 2016년, 2017년 등 지금까지 네 차례 무형문화재 지정 시도가 있었지만 심사 단계에서 신청자에 대한 관련 단체 전체의 동의를 받지 못해 제대로 심사도 받지 못하고 지정이 무산된 것이다. 양산문화원은 양산학춤 전수회관 건립도 추진하는 등 양산학춤을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 문화자산으로 적극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양산학춤은 통도사에서 전래해 지역에서 동면 출신의 학산 김덕명 옹이 전수해 민간 계보로 전승된 지역 고유 춤으로써 선비 사상을 강조한다. 이병옥 교수가 김덕명의 중후반의 행적을 살피고 예술성과 학술적 가치를 고찰하기로 한다.(편집자 주) 중반의 시련을 딛고 일어선 영남 명무 1975년 11월 5일 제6회 김덕명 전통고전(춤)전수자 발표공연을 부산대학교 대극장에서 마치고 한량무 강습을 할 때 진주팔검무회가 찾아와 진주시립국악원 및 진주 팔검무회의 상임사범을 부탁하여 승낙하게 되었다. 이듬해 1976년부터 1981까지 5년간 진주에서 전통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1975년 제6회 발표회를 마친 후 그는 모처럼 동래야류 공연이 있어 전수관을 찾아갔다. 그동안 그들과 친분이 있어 공연 후 뒤풀이로 학춤을 선보였던 것인데 때마침 동래야류 공연을 참관하려 방문한 문화재 전문위원 서국영(徐國英)은 그의 학춤을 보고 탄복했다. 그는 즉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는 김천흥(金千興, 1909~2007, 처용무 보유자)에게 발굴할 가치기 있는 학춤을 찾았다고 부산에 올 것을 알리자 소식을 듣고 증인확보를 위해 수제자 이흥구(李興九, 1940~ , 학연화대무 보유자)와 함께 부산에 왔다. 그리하여 1975년 김덕명은 김천흥 일행과 부산 동래별장에서 춤판을 벌였다. 3일 동안 이어진 그의 춤은 독특한 멋이 담긴 춤사위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절로 흥이 났다. 김천흥도 흥이나 직접 궁중정재 춘앵무와 학춤을 추었으며, 이흥구는 김덕명의 남성적이며 호방한 학춤에 반하여 기록수첩을 잃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부산·경남지방에서 전승되는 학춤에는 양산지역 학춤과 이미 1972년 9월 19일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된 동래학춤 등 두 종류가 있었다. 서국영, 김천흥 조사자들의 공동작업(1975.7.25.~8.25까지 조사활동)으로 이듬해인 1976년 12월 7일 『(양산)사찰학춤』(중요무형문화재 보고 제122호, 1976년5월 보고서 제출)의 무보를 수록한 조사보고서를 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여기서 양산사찰학춤의 유래(寺刹鶴춤의 由來)에 대해 수록내용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사찰학춤에 관한 문헌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조사할 수 있는 무수(舞手)들을 알아내어 그 계보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양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창건된 이래 그 어느 때부터 인지는 모르나 대재(大齋)행사 때나 종무(宗務)총회 시에 의례(儀禮)행사로서 승무와 학춤을 대대로 계승해 왔다는 말을 명무승려인 신경수(辛景壽, 1893~1965)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보광(寶光)중학교 교장 및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김말복(金末福)의 증언을 얻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조말엽 청종 시대까지의 무수(舞手)승려는 미상(未詳)이나 고종시대인 1980년부터는 이월호(李月浩, 당시 어산종장(魚山宗長)), 1980년대부터는 김설암(金雪岩), 그리고 1920년 이후에는 전술한 신경수와 양대응(梁大應, 1897~1972)등으로 승무와 학춤이 계승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도사에서는 특히 사찰학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 김말복은 신경수, 양대응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寺下) 부락인 신평리(新坪里)에 나와서 남소석(南小錫, 1904~1960)의 꽹과리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대로 신경수의 사찰학춤이 사하부락에 흘러나오기 이전에 이미 양산군(梁山郡) 동면(東面) 내송리(內訟里)에 학춤이 계승되어 왔는바 향토무용에 관심이 있었던 안화주(安化周, 당시 83세)의 증언에 의하면 동(同) 내송리 거주 김두식(金斗熄, 1843~1930)은 당시 곡수(穀收)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 출입을 한 분으로서 향토무에 자질이 있어 사찰에서 학춤을 즐겨 전수받아 추었으며, 이 춤을 다시 동(同) 부락거주 황종렬(黃鐘烈, 1897~1957)에게 전수했고, 이어 김덕명(52세, 김두식씨의 손자)에게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앞에서 언급한 신경수의 사찰학춤의 춤사위를 기억할 수 있다고 하는 김말복은 현재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의 학춤사위를 보고 통도사의 사찰학춤사위와 흡사하다고 인정하므로 김덕명의 학춤은 분명히 통도사 사찰학춤의 계열임을 결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양산군 동면 내송리에서 전해 온 이 학춤은 정월 대보름이나 팔월추석은 물론 이 이외에도 부락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통도사에서는 1935년경부터 이 학춤의 자취가 없어지고 내송리(內訟里)의 민간계(民間系) 학춤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그러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그에게는 평생의 숙원이었지만 1976년 김덕명의 학춤이 문화재지정에서 보류되었다. 그의 학춤이 보류된 이유로는 사찰학춤의 사찰계의 단절과 민간(재인)계로의 명맥 전승, 명칭의 불확실성(양산사찰학춤, 사찰학춤, 양산학춤 등) 과거 친구의 권유로 동래야류의 이수자에 등록된 것이 사적인 민원으로 영향을 미친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물론 그의 학춤은 조사과정에서 통도사 주지승을 지낸 김말복(金末福)을 중심으로 월하(月下)스님, 성파(盛波)스님, 김동만(金動萬)등 증언자들을 통해 전승경로가 이미 확인되었던 것이며, 양산사찰학춤이란 명칭도 학춤이 양산 통도사에서 전승된 춤이라는 이유에서 발굴조사자들이 정한 것이었다. 전문위원들이 그의 학춤조사를 위해 생존한 증언자들을 찾아다니며 채록할 때 통도사에서 비중이 큰 스님(경봉스님)의 증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번복된 증언이 반대 세력을 통해 제출되었고, 경봉스님의 고백으로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시키는 대로 번복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김덕명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문위원들이 조사 보고한 학춤은 지정 심의에서 보류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명은 1977년 12월 8일에 문화계의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양산사찰학춤’의 특별 강습회 및 실연을 선보이게 되었다.여기에 참가하였던 무용평론가 박용구는 "묻혀있는 우리춤이 제대로 발굴만 되면 훌륭하고 좋은 점이 이와 같이 다양하다”고 감탄했으며, 역시 무용평론가인 조동화도 "어찌 인간으로서 그토록 잘 출 수 있는가?”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예능보유자 김천흥도 흥에 겨운 나머지 그가 춤을 출 때는 손수 장고를 잡으셨다고 하며 덩실덩실 같이 춤을 추실 때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때까지는 동래야류에도 친분을 유지하고 하고 있었지만 지역적인 대립으로 인하여 중도에서 인연을 아주 끊고 말았다.그리고 비록 무형문화재 지정은 보류되었지만 양산사찰학춤 발굴조사로 인하여 김덕명은 중앙의 원로예술인들의 관심을 더욱 받게 되었고, 동연배의 예술인들과 교제하며 입지를 넓혀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김천흥과 성경린(成慶麟, 1911~2008, 이왕직 아악양성소 수료, 국악원장 역임)은 그의 학춤에 매료되어 영남지방의 독특한 덧배기춤을 보급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를 중앙무대의 예술인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76년 4월 16일 서울YMCA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특별 초청으로 시연(양산학춤)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1976년 6월 3일 주위의 권유로 제2회 전주대사습대회에 52세의 나이로 경남 춤꾼으로 출전했고, 심사위원인 김천흥, 최현, 김숙자 등은 이미 서울 시연회에서 그의 춤을 보고 탄복한 바 있다. 양반춤에 내재된 남성의 멋이 담긴 춤사위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서 장내가 떠들썩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 심사위원들이 그를 찾아와서 격려할 정도였고 그의 춤이 경연대회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한 것이었다. 그 후, 1976년 12월 8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초청으로 2차 시연회를 갖게 되면서 그의 춤은 전승보급에 발돋움하였다. 그가 ‘교방춤’(교방타령굿거리, 교방 살풀이, 교방양반춤)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면서 오늘날 무용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교방’ 명칭을 유행시킨 춤꾼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77년 4월 13일 서울 YMCA 제3회 전통무용 발표회에서 춤을 추었을 때는 400여명의 관객이 모두 찬탄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때 춘 춤은 양산사찰학춤을 비롯한 지성승무, 한량무 등이었다. 그 뒤 한양대학과 이화여대에서 10여 일 간의 강습회를 갖기도 했고, 같은 해 6월6일에는 양산에 있는 양산극장에서 방위성금 모으기를 위한 고전무용 발표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과 함께 호평을 듣기도 했다. 그의 춤에 대한 평으로는 1976년 11월11일자 국제신문에 "양산사찰학춤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1977년 6월 6일자 부산일보에 "20사위에 깃든 庶民들의 애환”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고, 1978년 『산업한국』 3월호에서는 "양산학춤에 대한 역사적 고찰 및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소개된 바 있었다. 1977년 7월에는 진주무용인들의 청을 받아 진주 민속예술보존협회의 전통무용부문 선생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78년 4월에는 진주시립국악원에서도 전통무용을 담당하여 가르쳤다. 11월9일에는 개천예술제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 최우수상을 받음으로써 그의 한량무가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로 지정되고 예능보유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본인뿐만 아니라 같이 한량무를 춘 8명의 무용가들도 모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도록 노력했는데 그 출연자들은 김덕명(한량), 성계옥(승려), 정행금(각시), 정필순(마당쇠), 서정남(별감), 김연이(주모), 최금순(상좌), 김정애(장고)등이었다. 이밖에도 그에게 춤을 사사받은 제자로는 조을주, 박계현 등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본인의 평생 목표인 양산사찰학춤만이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양산사찰학춤의 지정보류는 기쁨보다는 아쉬움만 더했다. 이어 1979년 11월 26일에는 서울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전통무용 발표회를 가졌는데 레퍼토리는 양산학춤을 비롯한 한량무, 양반춤, 타령, 굿거리, 지성승무, 나래무(살풀이), 잉어춤 등이었다. 이때에도 그의 춤을 본 김기수(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보유자)는 "이것이 춤의 오리지날”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활동은 무용에 대한 그의 의지와 욕망에 비례해서 점점 발표회나 전수에 열정을 쏟게 되어 1980년 5월에는 80불교 봉축제의 공연을 가졌고, 8월에는 진주에 "교방청 김덕명 전통무용 연구소”를 냈다. 또한 올바른 전통무용을 후세에 전수하고자 1981년 1월 9일 부산에도 전통무용 연구소를 내기에 이르렀다. 부산과 진주의 연구소를 오가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해 11월 23일은 일본 제총산(帝塚山) 대학의 초청으로 우리의 전통무용을 공연하여 그곳의 유일한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에 "한국의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김덕명!”이라는 제목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1982년 1월 10일에 발간된 계보(季報) 제총산(帝塚山) 대학에는 청초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춤이라고 특집으로 다루었고 그 학교의 교과서에까지 그의 춤에 관한 부문을 서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 후 1982년 3월부터는 부산전문대학 무용과 민속무용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렇듯 그의 무용에 대한 평가가 퍼져나가게 되자 부산지구 J.C신문은 1982년 6월 30일자에 "양반춤에 대한 소고”라는 제목으로 일면 전체를 그의 기사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의 춤이 사찰무용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불교 관계의 제반 공연에도 참가했던 바 1982년 11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불교협회 주최 자선공연에도 참여하여 양산사찰학춤과 양반춤을 추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는 늘 학춤을 출 때면 그 스스로가 학처럼 추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사람이 학이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1996년에도 구희서, 김옥진 조사자에 의해 ‘양산학춤’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하여 명칭을 변경하여 다시 제출하여 학춤이 문화체육부 관보에서 지정을 위한 예고까지 나왔으나 동래학춤과 병행해서 전승과정을 탐문 조사를 하던 중 계보에서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로 부각되어 나타나게 되어 학춤 전승이 부산 동래와 양산으로 분류되었지만 다 같이 이주서(李周瑞, 1865~1930)로부터 전승된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으로 나중에 지정 여부에 논란의 단서가 되었고, 또 다시 주위의 방해(동래 M씨가 문화재청에 찾아가 민원 제기)로 인하여 역시 철회 부결되고 말았다. 이렇게 김덕명은 문화재 지정에 있어서 두 번의 실패를 겪게 되면서 좌절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김덕명 전승춤의 전승계보 김덕명(金德明,1924~2015)은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8살(1932)에 범어사에 들어가 불가(佛歌)를 부르거나 불교(佛敎)의식무를 흉내 내었다. 김덕명이 전문적으로 전수받은 춤 계보는 4가지로 정리되며 그중 민간춤놀이는 마을전승이기에 계보로 말할 수 없다. 첫째, 사찰에서 전승하던 학춤은 고종 때부터는 이월호(李月浩, 1825년생, 당시 어산종장)―김설암(金雪岩, 1885년생)―신경수(辛景壽, 1893~1965)―양대응(梁大應, 1897~1972, 통도사 주지) 스님으로 계맥이 이어져 김덕명 씨가 보유하고 있다. 그때 양대응스님은 조부 김두식(金斗熄)과 절친한 사이로서 양산학춤, 지성승무, 바라춤의 명인이었는데, 1940년 16세에 이 춤들을 전수받았다. 또 당시 해인사에 있다가 통도사에 온 신경수스님으로부터 승무와 학춤을 전수받았다. 즉 두 분(신경수, 양대응)의 스님으로부터 사찰춤을 전수받았다. 둘째, 민간인으로부터 전수받은 재인춤은 통도사 소속의 민간인 김두식(金斗熄, 1843~1929, 김덕명 조부)이 곡수(穀數, 수사찰 재산 관리자)로 있으면서 학춤을 전수했는데 민간인 안화주(安化周, 1894~1965), 황종렬(黃鍾烈, 1897~1957)이 전수받아 다시 김덕명이 이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셋째, 기방춤으로 이주서(李周瑞, 1882년생)―고수길(高壽吉, 1888~1965, 당시 양상 권번 원장)으로 이어지는 춤맥을 전수받게 된다. 양산권번의 권번장(춤사범)인 고수길(高壽吉, 1888~1965, 동래권번에서 양산권번이적)로부터 그의 딸 고채봉(高綵峰)과 고채숙(高綵淑, 기명은 山月)과 함께 한량무, 교방양반춤, 교방타령무, 신라장검무, 교방진연무, 태극무 등을 배웠으나 사찰춤과 춤바디가 달라 애를 먹었다. 이어서 개성권번에서 양산권번으로 이적해온 김농주(金農宙, 1905~1955)와 오누이를 맺으며 기생소고무, 타령춤, 굿거리춤 등을 배웠고, 군무(群舞)로는 장원급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40~50여명의 인원이 함께 추는 부마도위춤도 배웠다. 넷째, 그가 복원한 민간춤놀이들은 딱히 전승자를 밝힐 수 없는 지역민들이며 김덕명은 탈춤과 토속민요 등 향토민속적인 기예능도 뛰어나 지역민속을 발굴하는데 참여하여 발굴한 것들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종목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사찰춤과 권번춤과 민간춤으로 크게 3계통으로 대별된다. 그는 일반인으로 사찰춤을 계승한 사람이며, 남성으로서 기생들의 춤인 권번춤을 전승받았다는 점이 다른 춤꾼들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27종은 크게 3계통으로 기방계(10종), 사찰계(4종), 민간계(13종)이 있다. 1. 기방계춤으로는 한량무(한량, 기생, 승려, 주모, 별감, 상좌, 사환 등), 교방타령춤, 교방양반춤(호걸양반춤), 교방진연무, 기생소고춤, 굿거리춤, 신라장검무, 태극무, 부마도위춤(군무), 장기춤. 2. 사찰계춤(재인계와 혼합)으로는 사찰학춤, 지성승무, 연등바라춤(탑돌이춤), 연등나례살풀이춤. 3. 민간계춤으로는 성주풀이춤, 쾌재나 청청춤, 각설이타령춤, 신노심불노춤, 농사요놀이춤, 장원급제놀이춤, 기우제놀이춤, 망시꼽배기놀이춤, 가락오광대놀이춤, 석전놀이춤, 망부석사록놀이춤. 회심곡춤, 떳배기춤(得排鬼춤). 김덕명의 춤사위 특징은 첫째, 특별한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정신 집중과 무게, 관절조절을 통해 안정적인 자세로 이루어지는 동작이라는 점이다. 단전을 이용한 깊은 호흡과 기가 조화를 이루며, 발을 디디고 누르는 굴신동작의 걸음걸이에서 관절의 유연함이 나타난다. 남성의 투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춤사위는 사찰춤과 권번춤에 두루 정통하여 지극히 예술적으로 승화된 춤이다. 쌍벽을 이루는 동래학춤은 이주서로부터 김귀조, 김문수, 김필상, 최순백, 김태현, 유봉오가 학춤을 사사 받았고 김귀조는 아들인 김희영에게, 김문수는 아들인 김동원에게 각각 전수하였으며 작고 이전에 김희영이 외조카 이현경에게 전수하였으나 중단되었고 김동원이 유일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현재 구음보유자로 유금선이 지정되었으며 김태형, 이성훈이 기능보유자 후보로, 김정양 이광호가 전수조교로 꾸준히 전승하고 있다. 이에 비해 양산사찰학춤은 1976년 당시 무형문화재보고서 조사자 서국영의 기록에 의하면 김말복이 증언하기를 1880년대 이후 이월호(1852~?), 1983년대부터는 김설암(1885~1970), 1920년 이후에는 신경수(1893~1965)와 양대응(1897~1972)스님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부락인 신평리에 나와서 남소석(1904~1960)의 꽹쇠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양산사찰학춤」이 통도사에서 전승되었음은 민간인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윤장우씨는 1938년부터 통도사 광원에 있으면서, 1945년까지 절에 있었는데 스님들 중에서 끼가 있는 스님들이 사하부락인 평산리 주막에서 춤과 소리를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태어나 하북면의 면장이 된 지명구씨는 어릴 적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양대응(1897~1972)스님이 장구장단에 맞추어서 학춤을 추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통도사에 있었던 신경수(1893~1965) 스님은 당시 명무 승려로서 학춤을 잘 추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사찰에서는 대제(영산재 등)를 지낸 후 신도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사찰경내 마당에서 사찰의식 외에 여흥을 펼치는 사례가 많았다. 이때 외부에서 놀이꾼을 초빙하기도 하고 또는 장기가 있는 승려가 직접 춤을 추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김덕명(1924~2015)은 통도사에서 신경수, 양대응 스님에게 「양산사찰학춤」을 배웠다. 남사당의 북소리에 이끌려 동네잔치에서 춤을 추는 김덕명을 부모는 아들이 혹여 광대라도 될까 통도사로 보냈으나 오히려 통도사에서 「바라춤」, 「지성승무」, 「장검무」, 「학춤」 등을 배웠다. ‘학산’ 이라는 호는 절에서 나올 때 통도사 보화스님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학춤공부를 많이 한 덕명이 나무 위에서 학이 날듯, 학춤을 잘 춘다는 뜻이었다. 위의 계보 외에 「양산사찰학춤」을 추었던 스님들은 더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점차 사찰계에서 학춤의 자취가 사라지고 현재는 추어지지 않고 있다. 둘째, 민간(재인)춤의 형성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무형문화재 보고서 제 122호에 따르면, 처음 민간으로 전승되어진 과정은 김두식(金斗熄1843-1930)에 의해서였다. 김두식은 당시 곡수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를 출입했으며, 사찰에서 학춤을 전수받아 추었다. 이 춤을 다시 동부락 거주 황종렬(黃鐘烈,1897-1957)이 전수받았고 이어 김덕명(金德明)에게 전해졌다. 동면의 황종렬은 춤에 대한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동면 내송리 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도적으로 춤을 통해 흥을 도왔다고 하며 양산 출입도 매우 빈번했다. 특히 내송리에 있는 주점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의 전승계보 외에 양산에는 학춤을 즐겨 추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양산에서 명무수로 이름난 이주서(1869-1944)란 사람이 학춤을 잘 추었으며 당시 이 춤이 서상건(1982-1967)에게 전승되었다며 1976년 당시 조사자인 서국영에게 증언하였다. 서상건씨는 양산에서 가장 큰 포목점(일신상회)을 경영하면서 매우 부유하게 생활하였고, 풍류를 즐겼던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춤을 즐겨 추었다. 그래서 양산에서는 그의 별호가 "춤 잘 추는 서상건”이란 소문이 생겨났고 주로 동래온천장에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우성렬(1930- :서상건의 먼 친척)씨가 증언하였다. 이렇듯 양산에는 여유로운 풍류객들이 많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김두식, 황종렬에 이어 김덕명은 통도사에서 학춤을 배웠으며 민간에서 또한 전수받아 꾸준한 활동과 「양산사찰학춤」의 보존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감덕명이 증언(2015. 5.16, 김덕명자택에서)한 지성승무에 대한 배경설화는 다음과 같았다. 지성승무는 두 가지가 있는데 군무와 독무로 춘다. 김덕명 선생님이 중언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어느 사찰의 스님이 불도를 닦다가 탁발하려 동네에 내려갔는데, 동네 어구의 밭두렁에서 어린아이가 풀을 뜯어먹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하여 아이를 업고 동네를 들어가니 마을사람들이 돌림병으로 모두 죽고 아이만 살아서 먹을 것이 없어 밭두렁에서 풀을 뜯어먹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스님이 아이를 데리고 사찰로 돌아와 상좌승으로 키우게 되었다. 그 후 상좌가 두 명(악기다루는 어산상좌, 수발과 교육하는 상좌)이 있었다. 그 후 노승은 불법해탈을 위해 토굴에서 여러 해를 불법을 깨닫기 위해 참선을 하며 불공을 드리고 마치고 돌아서 나오던 중 연유도 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뒤에서 함께 불공을 드리던 상좌가 심히 놀라 동분서주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고 상좌의 보살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승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노승의 시신을 끌어 앉고 통곡을 하던 상좌도 너무 슬픈 나머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어려서 데려다 키운 상좌는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노승이 쓰러지니까 슬픔이 깊어 기절해 같이 쓰러진 것이다. 상좌가 기절하여 비몽사몽간에 백발도승이 검은 지팡이를 짚고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지팡이를 쿵쿵 두드리며 "네 이놈 상좌야! 노스님은 너의 불거지운명(不居之運命)로 너의 살기(殺氣)에 스님이 죽어가고 있는데 너마저 누워 있으니 한심하구나! 빨리 일어나 스님을 구해라!” 하고 도승이 지팽이로 "꽝!”하고 땅을 치는 호통소리에 놀라 상좌가 벌떡 일어나 "소승의 스님을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을 하며 세세사정을 말하니 "허허, 너의 갸륵한 마음이 기특하니 노스님을 살리는 비법과 방도를 가르쳐 줄 테니 그대로 이행하거라” 그러자 순간 몇 명의 악단이 좌우로 둘러앉아 장단이 울려 퍼지고 도승은 가락에 맞춰 춤을 추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추는 춤을 잘 보아라. 이 춤을 너의 노스님 앞에서 정성껏 추게 되면 분명코 살아날 것이다.” 이어 말하기를 "그러나 너는 나와 몇 가지 약조를 꼭 지켜야 한다. 노스님이 살아나시거든 내가 전해준 그 승복을 벗어 북에 걸어 두고 소생하신 노스님을 부축도, 말도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잠시도 지체 말고 노스님과 바로 하직하고 남으로 계속 내려가면 깊은 산골짜기에 암자가 있을 것이니, 그 암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필경 성불할 것이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있는 상좌에게 도승은 다시 "노스님과 너는 숙명적으로 액과 악이 맺혀 영원히 동거생활이 불가능하리라. 만약 나의 명(命)을 어기면 너와 노스님은 변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놀라 깨어난 상좌는 선몽이 분명하며 옆에 도승이 준 승복과 염주가 있어 착용하고 노스님을 살려야한다는 일념으로 어려워 잘 생각나지 않는 춤이지만 정성껏 춤을 이어 추었다. 그러자 노스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몸을 돌리며 긴 숨을 내어 쉬며 깨어났다. 환희에 차 기쁨의 춤을 추며 노스님을 부축해 일으키고 싶었지만 도승의 명을 염두에 두니 앞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노스님을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상좌의 마음은 오죽했겠지만 등지고 떠나 일러준 남으로 가서 암자에서 노스승을 살린 고귀한 이 춤의 연유를 고이 간직하여 후세에 물려주며 이르기를 "이 춤을 지성껏 전수시켜 만대에 전하라” 이르렀고, 이름 하여 '지성승무'라고 전했다.” "나(김덕명)는 춤이라면 좋아서 승무든 학춤이든 열심히 배웠다. 하루는 내가 잘 아는 통도사 스님(당시 대처승, 단청제작)이 내려와 보시고 승무 내용이나 아나? 하시면서 한 시간에 걸쳐 승무설화를 이야기를 해주셨고, 스님 급수에 따른 가사장삼에 대한 복색이야기도 해주셨다. 당시 금강암(지금은 비구니들이 기거하는 암자)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부인이 기거하였다. 그때 이동안(수원화성재인청 소속, 발탈보유자)이 부산에 내려와 활동할 때인데 내 스승이라 하면서 암자 작은방을 소개하여 공짜로 기거할 수 있게 해주고 살림과 음식장만을 내가 다해주었다. 광대줄타기를 했는데 기능이 약해 그 후 다시 서울로 갔다.”한편 향토민속예술의 발굴활동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여 ‘진주의 한량무’, ‘김해의 석전놀이’, ‘가락오광대’, ‘양산의 웅상망시곱배기놀이’등이 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김덕명이 결코 춤을 떠날 수 없었던 춤 인생은 세속적인 고초를 겪으면서도 단념하지 않은 운명이었다. 그렇게 걸어온 그는 남성의 멋을 잃지 않았고, 굵은 선과 힘, 부드러움이 조화된 그만의 특출한 춤사위를 지켜왔다. 오늘날 남성춤이 중성화 또는 여성의 모습이 강하게 묻어나온다면 그의 한량무와 학춤은 남성의 장점을 표출시킨 것으로 남성춤의 지존을 지킨 마지막 사찰춤과 영남춤꾼이었다. 김덕명 춤사위 성향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크게 두 가지 계통을 잇고 있다. 우선 사찰계통춤의 춤이며, 다음은 기방계춤이다. 그렇다면 그이 춤은 어떤 계통의 성향일까? 전수내용적으로는 사찰계와 기방계의 혼합성향이지만 그의 인생 후반에 나타난 춤 성향은 기방계통보다는 사찰계(재인계)적 성향이 월등이 높게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에 김농주로부터 엄격한 기방춤 기법을 몸에 익혔지만 성장하면서 기방춤의 교태미는 사리지고 남성성향이 큰 재인계적 성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게다가 거구의 체격에다 탈춤에서 나타난 영남춤의 덧배기춤적 특성을 강렬하게 품고 있어 국내 전통무용가 중에서 가장 영남성향과 재인성향을 간직한 춤꾼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기방계적 섬세함이 덧씌워져 있어 거친 남성성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올곧은 전통춤 즉 기방춤의 섬세한 기법이 몸에 배어나 춤집이 크고 활기가 넘쳐도 투박한 마당춤이 따를 수 없는 표현력을 지녔다. 비교의 예를 들자면 동시대 같은 남성무용가라도 이매방은 어린 시절 처음 입문한 춤이 기방춤(권번 함국향의 첫 가르침)으로 형성된 춤바탕이었다. 그 후 재인춤인 이대조, 박용구의 춤들을 익혔지만 이미 몸과 마음의 성향이 기방계로 고착된 춤성향이 평생춤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래서 이매방춤은 기방계통성을 지켜온 ‘춤속’과 ‘춤바디’를 평생 지켜 전승한 것이다. 반대로 김덕명은 맨 먼저 체득한 춤이 사찰계춤이다. 사찰계의 특성은 재인계적 성향과 불교의례적 성향이 혼합된 것이지만 김덕명은 범패작법을 주로 행하는 어산승(魚山僧)이 아닌 민간인이었기에 춤성향에서 불교의례적인 성향은 약화되고 재인계적 성향만이 남게 된 춤성향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김농주라는 개성권번에서 활동한 명기의 가르침도 어린 시절에는 기초로서 가능했지만 성인이 되면서는 춤의 본성이 나타난 것이다. 마치 궁중의 무동들처럼 어린 시절에는 중성적인 성향으로 여성적인 고운 춤을 익혔어도 사춘기를 넘어서면 남성성향이 나타나 악사로 전향하거나 퇴출한 것과 같은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하나 그간 문제가 되었던 동래학춤과 양산사찰학춤의 전승계보에서 윗대에 같은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라는 점으로 양쪽 학춤의 실존성은 함께 증명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전승과정에서 성향이 아주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즉 현전하는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을 비교해볼 때 동래학춤은 동래권번을 중심으로 전승되다보니 기방계적 성향이 강해졌고, 동래는 부산이라 춤추는 인적자원이 풍부해 군무형태로 전승되었다. 이에 비해 양산은 시골이라 춤추는 인적 자원도 부족하고 통도사를 중심으로 전승한 사찰춤으로 재인계적 성향이 강화된 춤이다. 따라서 두 지역 학춤을 보면 동래학춤은 기방계적 성향에다 동래기생 유금선(1931~2014)보유자의 구음소리가 흥을 돋우어 곱고 부드러운 날개춤사위로 여러 마리 학이 어우러지는 ‘기방계적 군무학춤’으로 발전하였고, 양산학춤은 사찰중심으로 춤집도 크고 활기 넘치는 춤사위로 전승한 ‘사찰(재인)계적 독무 또는 쌍무 학춤’으로 차이가 있다. 학춤사위의 구체적인 표현에서도 동래학춤은 학의 형상을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데 비해 양산학춤은 학의 생태성과 겉모습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춤사위가 많다는 점이다. 즉 동래학춤은 동래야류의 양반춤사위 중에 학춤과 유사한 배김사위, 옆걸음사위, 활갯짓 뜀사위 등과 모이 줍는 사위, 외발사위 정도이고 양팔을 어깨 위로 들고 추는 날개사위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발사위도 한쪽다리를 구부려들고 다른 쪽 다리는 길게 뻗어 학의 긴 자태를 나타내는 발사위 특징을 보이며 주무수와 조무수가 윤무형태의 군무로 대형변화가 많은 점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양산학춤의 팔사위는 학날개, 학머리로도 표현하고 땅에 내려앉는 사위, 위엄을 보이는 사위, 좋아서 으쓱이는 사위, 먹이 쪼는 사위, 놀라 펄쩍뛰는 사위, 짝을 어르는 사위, 동사위, 비상하는 사위 등 24가지 학의 습성을 나타내는 학춤사위가 다양하며 발사위는 양다리를 균등하게 구부리며, 독무나 군무로 출 때도 앞으로만 진행하거나 시계반대방향으로만 진행하는 등 대형보다는 학춤사위에 치중하여 동래학춤과는 사뭇 다르고 다양하며 예술성이 높고 활기가 넘친다. 또한 양산권번 고문인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권번으로 가서 학춤을 전승시켰다고 하는 것은 학춤의 본류가 양산(통도사)이고 지류가 동래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며, 양산과 동래의 춤전승 환경이 달라 서로 달라진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지역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동래는 이주서의 학춤 영향력이 절대적이고 단일적 계보(이주서>김귀조, 김문수>김희영, 김동원>유금선, 김태형, 이성훈)였다면, 양산은 이주서 외에도 동시대 전승자(김설암, 김두식, 고수길)도 많았고, 계통 계보도 사찰계(김설암>신경수>양대수>김덕명), 재인계(이월호>김두식>안화주>황종열>김덕명), 기방계(이주서>고수길>김농주>김덕명) 등 다양하였기에 학춤의 풍부한 내용과 전승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은 같은 영남지역춤이라 할지라도 춤성향과 춤사위 특징이 많이 달라 무형문화재로 양산학춤을 지정하는데 동래학춤이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산사찰학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보까지 올랐으나 동래측의 반발로 무산된 것은 한국전통춤 중에서 가장 남성다운 학춤(한량무 계열)이 지정되지 못하게 되어 여성성이 강한 살풀이춤, 태평무, 승무 등만이 편중되는 역사적 오류를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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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청 춤꾼 이동안한국무용가 정주미 춤꾼이 스승 이동안 명인에 대한 에피소드와 함께 재인청 춤에 대한 자신의 진솔한 여정을 에세이집으로 출간하여 화제다. 이동안 명인은 재인청의 예맥을 이어 내린 세기의 광대로 김인호의 제자다. 명창 이동백과 근대무용의 아버지 한성준의 증언에 따르면 김인호는 구한말 순종과 함께 대청마루에서 놀았던 광대 중의 광대였던 인물이다. 저자 정주미 춤꾼은 스승 이동안과의 만남과 사사, 그리고 스승의 사후로 이어지는 관계 가치를 진솔하면서도 질곡한 문장으로 소개한다. 스승과 제자라는 사이에서만 가능할 수 있는 소통의 과정을 여느 무용평론가의 문장과는 현저히 다른 편안하면서도 역사적인 통찰의 눈을 보여준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나는 춤꾼이다. 우리 춤에도 이른바 여러 유파가 있어서 굳이 유파 속에 나를 넣는다면 ‘재인청’이라는 유파의 춤꾼이다. 그런데 재인청은 한국무용사의 입장에서는 결코 유파가 아니다. 정리하면, 재인청은 하나의 유파인데 유파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 모순적 진술을 해명하기 위해” 자신의 시각을 에세이 형식으로 이야기한다. 이 책은 저자가 현실에서 만난 날줄의 스승 이동안은 낯선 언어와의 만남이라 규정한다. 그 낯선 언어들이 해독되는 지점이 바로 역사 속에서 만난 씨줄의 스승 이동안이 날줄과 교차하는 지점이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일정한 어법이 있었음을 이해하고 드디어 스승의 정체를 파악하는 구조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읽히는 한 편의 인물론이자 무용사라 할 것이다. 저자는 스승의 정체를 파악함과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과 앞으로의 지향에 선명성을 획득하고 있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단은 이를 잘 보여준다.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내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쏟은 시간이 이동안 선생께서 이 땅에 쏟은 시간에 대한 보답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선생의 삶이 ‘내가 왜 재인청 춤을 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이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이 책이 스승 이동안 춤꾼을 향한 제자의 헌사(獻辭)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다.” 정주미 -재인청춤전승보존회회장 -재인청 이동안태평무 전승자 -국가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 이수자 -경남무형문화재 제 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 이수자 -개천예술제국악경연대회 대상 -한민족예술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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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45) <br> 이병옥 명인의 '송파산대놀이' 춤사위송파산대놀이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 송파산대놀이는 약250여 년 전부터 송파진(현재 잠실 석촌호수 남쪽 주변,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한강 줄기)에 서던 송파장을 중심으로 연희되어온 산대탈놀음이다. 연희 형태는 춤이 주가 되고 시대상을 풍자하는 재담과 창, 등 여러 가지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주음악은 삼현육각(三絃六角 장구, 북, 피리2, 대금, 해금)의 악기구성으로 염불 12박, 타령, 굿거리장단이 주가 되며, 당악, 자진타령, 자진모리, 휘모리장단 등이 쓰인다. 송파산대놀이 춤사위는 염불장단 거드름춤, 타령장단 깨끼춤, 굿거리장단의 건드렁춤으로 분류되며, 기본춤사위는 주로 타령장단의 깨끼춤으로 화장무, 자진화장, 여닫이, 배치기, 어깨치기, 곱사위, 멍석말이, 깨끼리, 거울보기, 빗사위, 팔뚝잽이 등 40여종이 있고 배역마다. 독특한 배역 춤사위가 있다. 즉 상좌 합장재배, 옴중 용트림, 노장 복무, 소무 자라춤, 샌님 삼진삼퇴, 말뚝이 채찍춤, 완보 곤장춤, 원숭이 깡총춤, 왜장녀 배춤, 해산어멈 엉덩춤, 취발이 녹음채춤 등이 있다. 이병옥 (용인대학교 명예교수) 송파산대놀이 전수 교육조교 선정 (1981) (사)국가무형문화재 49호 송파산대놀이보존회 회장 (2010-2022) 종신 국가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 명예보유자(2023. 7) (사) 송파민속보존회 이사장 ( 2010– 2022) 대표저서 ( 총29권, 공동집필 35권) 1982. 송파산대놀이 연구, 집문당. 1991. 북한의 공연예술 Ⅱ<무용. 음악 편>, 고려원(3인 공저). 1996. 한국무용사 연구Ⅰ<고대편>, 도서출판 노리. 2013.『한국무용통사』고대편, 민속원. 2014.『Dance of Korean』(영문판), 국립국악원 한국음악학 씨리즈 6(9인 공저). 2014.『진주교방과 민간전승의 예술 연구』, 진주문화연구소(6인 공저). 2015. 전통춤의 흐름과 전승현황, 한국전통춤협회(3인 공저) 2019.『전통춤 4대 명무』(한영숙, 강선영, 김숙자, 이매방), 한국전통춤협회(5인 공저), 민속원. 2019, 이동안 선생의 예술세계, 화성문화원(5인공저) 2020. 송파산대놀이 연행과 기원, 송파산대놀이보존회(단독 집필) 2020. 경기재인청 복원과 활용을 위한 연구, 오산문화원(6인 공저) (기타 연구논문 80여 편, 학술발표 50여 편, 비평논단30여 편, 비평리뷰 170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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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 '송파산대놀이'‘송파산대놀이’ 명예보유자 이병옥 교수는 서울대학교 무용교육학을 전공했으며, 용인대학교 예술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교육부장관상과 무용문화재예술단 공로상 등을 수상한 바 있는 그는 ‘한국 무용민속학’ ‘무용인류학 탐구’ ‘한국고대무용사 연구’ 등 저서 30여 권을 출간했고, 지난 40년간 500여회의 송파민속공연을 기획·출연했다. 현재 한국춤비평가협회 공동대표이자 춤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약250여 년 전부터 송파진(현재 잠실 석촌호수 남쪽 주변,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한강줄기)에 서던 송파장을 중심으로 연희되어온 산대탈놀음이다. 1973년 11월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산대놀이(山臺戱)는 구파발, 애오개(阿峴), 사직, 녹번, 노들(露梁津) 등지에 전승되었으나 모두 소멸되었다. 현재는 경기도 양주와 서울의 송파지역만이 전승되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퇴계원산대놀이가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22년 ‘한국의 탈춤’ 18종이 유네스코 인류뮤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송파진은 전국 15대 향시(鄕市) 중의 으뜸인 상역지로 강원도의 뗏목상인과 삼남지역의 마행상과 보부상들이 몰려들어 270여개의 객주집이 성행한 장터였다. 연희 시기는 정월대보름, 단오, 백중, 한가위 등의 명절에 세시놀이로 행해졌는데, 특히 백중 명절에는 각 지방의 명연희자들을 초청하여 1주일씩 탈놀음을 하면서 매일장이 서다보니 5일장의 풍습을 해친다는 상소(영조~순조대, 18~19세기)를 수차례 올렸지만 백성들의 생업(生業)이라 하여 윤허(允許)되었다. 부자상인들이 추렴하여 풍물로 시작하여 씨름 붙이고(씨름대회), 민요 부르고, 줄 걸고(줄타기), 저녁에 횃불을 밝혀 산대놀이를 벌이면서 장이 어우러지게 했다고도 전한다. 연희형태는 춤이 주가 되고 시대상을 풍자하는 재담과 창 등 여러 가지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주음악은 삼현육각(三絃六角/ 장구, 북, 피리2, 대금, 해금)의 악기구성으로 염불 12박, 타령, 굿거리장단이 주가 되며, 당악, 자진타령, 자진모리, 휘모리장단 등이 쓰인다. 춤사위로는 염불 거드름춤, 타령 깨끼춤, 굿거리 건드렁춤 유형으로 나뉘며, 40여종의 춤사위로 세분화되어 있다. 마당구성은 탈놀음 12마당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으며, 탈의 수도 32개로 산대도감 탈들이 거의 보존되어 있어 비교적 고형을 보존하고 있다. 연희 순서는 먼저 산대놀이 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며 탈춤을 추면서 길놀이로 마을과 장터를 돌아와 탈을 벗어 고사상 앞에 놓고 탈고사를 지낸 다음 12마당을 진행한다. 첫째마당: 상좌춤놀이/ 둘째마당: 옴중놀이/ 셋째마당: 연닢·눈끔재기놀이, 넷째마당: 애사당북놀이/ 다섯째마당: 곤장놀이/ 여섯째마당: 침놀이/ 일곱째마당: 노장놀이/ 여덟째마당: 신장수놀이/ 아홉째마당: 취발이놀이/ 열째마당: 말뚝이놀이/ 열한째마당: 샌님·미얄·포도부장놀이/ 열두째마당: 신할애비·신할미놀이(이병옥, 해설 자료에서) 이병옥 (용인대학교 명예교수) * 1979~1981 :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 석사 * 1981~1983 :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무용교육학과 석사 * 1989~1993 : 경기대학교 대학원 이학박사 학위 취득 송파산대놀이보존회 전승활동 연보 * 1973. 8- : 송파산대놀이 교사강습으로 입문 * 1974. 4 - : 송파산대놀이 회원 입회 * 1976. 8 - 80.12.30 : 송파산대놀이 전수장학생 * 1978.2 - : 송파산대놀이 보존회 총무 * 1980.12.30- : 송파산대놀이 이수자 * 1981.4.1 - 89.12 : 송파산대놀이 전수교육조교 선정 * 1978. 10 - :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송파산대놀이 연출지도 * 1978. - : 「송파산대놀이 연희본 1집」 완성 * 1980. 8 - : 「송파산대놀이 연희본 2집」 완성 * 1980. 9 - : 「산대놀이 춤사위 연구」, 민속학회, 한국민속학 13집 * 1981. 9 - : 「송파산대놀이의 옛 놀이판과 배경」.민속학회, 한국민속학 14 * 1981. 10 - : 제22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 서울특별시 출품작 ‘송파산대놀이’ 연출지도(문공부 장관상 수상) * 1982. 10 - : 저서 "송파산대놀이 연구" 출간(집문당) * 1986. 3 - 87. 2 : 송파산대놀이 보존회 상무이사 * 1993. 9 - : 「송파와 양주 산대놀이 춤사위 비교연구」, 용인대 논문집 9집 * 1994.12 - 96.12. : 서울시무형문화재3호 송파다리밟기 보유자후보역임 * 1995. 1 - : 「송파백중놀이」 발굴조사보고서, 한국예총 서울시지회 * 1994. 3 – 10.2 : 사단법인 송파민속 보존회 부이사장(부회장) * !997. 12 - : 「송파산대탈춤 중 "깨끼춤” 에 함유된 동작미 분석」, * 2000. 8.22- 22.6 : 송파산대놀이 전수교육보조자 재선정 * 2006. 1 - : 『송파산대놀이』집필, 국립문화재연구소, 도서출판 피아 * 2010. 3 – 2016.4 : (사) '국가무형문화재 49호 송파산대놀이보존회 회장 * 2016. 3 – 2023.3 : (사) '국가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보존회' 회장(문화재청 등록) * 2023. 7 – 종 신 : 국가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 명예보유자 * 2010 – 2022 : 사) 송파민속보존회 이사장 <대표저서>( 29권, 공동집필 35권) 1982. 송파산대놀이 연구, 집문당. 1991. 북한의 공연예술 Ⅱ<무용. 음악 편>, 고려원(3인 공저). 1996. 한국무용사 연구Ⅰ<고대편>, 도서출판 노리. 1998. 승무,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살풀이춤,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중요무형문화재Ⅰ<무용과 음악>, 대원사(2인 공저). 2002. 안성향당무, 용인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 2004. 무용인류학 탐구, 도서출판 노리. 2006.『송파산대놀이』, 국립문화재연구소편, 도서출판 피아. 2006. 이병옥 무용평론집{춤따라 세월따라}」, 도서출판 노리. 2006.『승무의 기원전승과 지역유파 연구』, 도서출판 노리. 2008.『살풀이춤 류파와 계통연구』, 도서출판 노리. 2008. Korean Folk Dance", 한국국제교류재단. 2011.『국무 우봉 이매방』, 금풍문화사(2인 공저). 2013.『한국무용통사』고대편, 민속원. 2014.『Dance of Korean』(영문판), 국립국악원 한국음악학 씨리즈 6(9인 공저). 2014.『진주교방과 민간전승의 예술 연구』, 진주문화연구소(6인 공저). 2015. 전통춤의 흐름과 전승현황, 한국전통춤협회(3인 공저) 2019.『전통춤 4대 명무』(한영숙, 강선영, 김숙자, 이매방), 한국전통춤협회(5인 공저), 민속원. 2019, 이동안 선생의 예술세계, 화성문화원(5인공저) 2020. 송파산대놀이 연행과 기원, 송파산대놀이보존회(단독 집필) 2020. 경기재인청 복원과 활용을 위한 연구, 오산문화원(6인 공저) 2021. 자유로운 영혼의 춤꾼, 송화영", 도서출판 지식나무(2인 공저) 2021. 제주 제8호 제주해녀춤·물허벅춤 예능보유자 이연심", 제주원로예술인 구술채록, 제주문화예술재단 기타 연구논문 80여 편, 학술발표 50여 편, 비평논단30여 편, 비평리뷰 170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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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2)김종욱 최근 예술단체 간의 합동문제가 날로 비등되어 사계의 많은 주목을 이끌고 있던 차에 조형미술동맹에서는 18일 오후 3시부터 시내 서울신문사 회의실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조선미술가동맹과의 합동문제에 관하여 토의한 바 금 20일부터 개최되는 ’조형‘ ’미동‘ 양 단체의 합동미술전을 계기로 이 전람회가 끝나기 전에 정식으로 합동이 체결되도록 주선할 것을 결의하는 동시에 즉시 합동 준비위원을 선정하고 동 6시 반 폐회하였는데 이날 선정된 준비위원은 다음과 같다. 윤희순尹喜淳, 길진섭吉鎭燮, 김기창金基昶, 유석연柳錫淵, 정종여鄭鍾汝, 정현웅鄭玄雄, 최재덕崔載德, 이석성李錫成, 이완석李完錫, 서강헌徐康軒, 이 d성李ㅇ晟 (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8. 15 기념작품전]: 태백미술원에서는 단독으로 개최 예정이든 8, 15 기념향사에 관한 최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이번에 조선공예가협회와 합동으로 미술전을 지난 16일부터 1주일 간 시내 본정 2정목 태백서적공사(구 환선) 3층 화랑에서 개최중 일반에 많은 호평을 받고 있는데 그 출품작과 작자 씨명은 다음과 같다. 마술부= ‘물레방아’ (정홍거鄭洪巨), ‘시작試作’ (장우성張遇聖), , ‘양주풍경楊州風景’ (김영기金永基), ‘취가조吹哥鳥’‘(조용승曺龍承), ’배‘(장우성), ’환성歡聲‘ (박원수朴元壽), ’노도蘆渚‘(배렴裵濂), ’소‘ (이응로), ’국화國華‘ (金永基), ’의기선생義基先生‘(이유태李惟台), ’봄‘(박원수), ’나비‘ (정진철鄭鎭澈) 공예= ‘연못가의 하루’(윤봉숙尹鳳淑), ‘성기盛器’ (백태원白泰元), ‘틀 풍경’ (윤봉숙),‘ 도소합陶小盒’ (김재석金在奭), (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조선미술가동맹 이전] : 조선미술가동맹- 무교정 6번지(전 극단 ‘청포도’ 적跡)로 이전(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 문학 = [뉴욕 대학 교수 강용흘씨 귀조]: 3. 1운동의 민족적 반일투쟁을 주제로 한 ‘초당草堂’이라는 소설을 해외에서 출판하여 이제부터 우리에게 존경을 받아온 강용흘씨가 이번에ㅡ30년 만에 귀국하였다. 씨는 일제의 악정이 바야흐로 조국에 허물어들기 시작하자 표연飄然히 조국을 하직하고 1919년 만주, 중국, ‘캐나다’ 등지를 거쳐 동 22년에 미국으로 들어갔었다. 그런데 그동안 씨는 미국의 ‘허버드‘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콜럼비아‘ 대학의 동양학 강사와 ’뉴욕‘ 대학의 문과교수로 장년 조선을 위하여 활약하였으며 이동안 세계를 놀라게 한 ’춘향전‘의 소개로도 찾은 것이다. 그러한 씨가 거去 17일 인천항에 미군 정부의 중요임무를 띄우고 환국하여 작일 오전 10시 미 군정청 기자단과 회견하고 환국의 인사소감을 피력한 바 잇는데 특히 씨는 왕방한 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나는 수개월 내지 1년 간 조국에 체재하여 전연 정치적 문제에는 ‘터치’ 않고 순수한 우리 문단 특히 미술을 외국에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의 작품으로는 ‘초당’과 ‘동양이 서양으로’가 있고 또 최근 집필을 마친 장편문학론으로 ‘20세기 문학’ 이 있다. 입경한지 불과 몇 일 되지 않아 아직 여장을 끌르는 참이니까 생소한 것뿐이어서 자세한 것은 후일 말하겠다.”(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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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8일 김진옥, 정명자, 박경랑, 3인3색 명무전길라잡이 강신구 / 전통예술평론가 박경랑선생은 어디서든 준비된 곳이라면 멋을 알고 휘어 감는 관능미를 지닌 무용가라 할 수 있다 어릴 적 4세부터 경남 고성에서 외증조 김창후로부터 대를 이어 영남춤의 맥을 올곧이 이어 가고 있다. 부산, 진주시절은 춤 선생 김수악, 김진홍, 동래 권번(捲番)의 마지막 기녀인 강옥남으로 부터 엄격한 규율과 강한 성품으로 무용 수업을 받아 오늘날 든든한 교방청춤 전승자로 지켜 온 분이다. 교방청춤, 교방소반춤, 교방승화무(敎坊僧花舞), 교방검화무(敎坊劍花舞), 교방건무(敎坊巾舞) 등, 문화재 지정종목에 가려 묻히고 사라져 가는 선현들이 추어 온 교방가무연 춤가락이 발현되지 못한 점을 못내 아쉬워한다. 박경랑은 50여년을 전통춤과 함께 살아 온 2세대 중심 춤꾼으로 깊숙이 자리매김한 본능적인 끼가 확연히 자리 잡힌 풀뿌리 춤꾼이다. 명인의 등용문인 전주대사습 무용부 장원, 서울전통공연예술대회 대통령상, 김수악류 진주교방굿거리 1기 이수자로서 영남 교방청춤하면 바로 박경랑을 전무후무한 독보적으로 떠올릴 만하다. 반듯한 춤 태와 완성도 높은 내공으로 무대 적응을 철저하게 표현해 냄으로서 자신만의 작품을 극대화 시키는 곰삭은 멋과 한을 표현해 낸다. 이로 하여 원형을 재현하는 신명난 춤 세계를 구현 하므로서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춤꾼이다. 문둥춤을 보노라면 공옥진여사의 짠한 마음은 누구나 같은 마음 일찐데.... 김진옥선생은 열정과 진취적인 무용지도자로 단아한 전통미를 갖춘 춤꾼이다. 일찍이 스페인 무용의 1세대인 주리선생으로부터 인체의 기초를 다진 다부진 몸매로 우리 춤 몰두를 위해 마산 출신 김해랑, 최현, 정민에 이은 2세대 명맥을 이어 온 성실하고 폭 넓은 활발한 춤꾼이다. 우리 춤이 시대에 가려진 7,80년대, 이매방과 정민이 우정이 두터운 사이였던 시기, 무용가 양정화는 두 분의 선생을 가까이 모시면서 일본 오사카를 오가며 묻혀져 가는 전통의 맥을 계승하고자 힘든 시기를 겪은 무용계에 깊이 점철된 무용가 분이셨다. 김진옥은 1.5세대인 양정화, 정재만에 이어,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신념과 열정으로 정민류의 교방무, 교방타고무, 교방검무 등의 기법을 오롯이 이어 가는 역정에 사로잡힌 춤꾼이다. 김진옥은 정민류교방춤보존회을 발족, 전승에 혼신을 바쳐 오늘에 이르러 수많은 제자 양성과 다양한 수상 경험을 이루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춘 괄목할 현실 전통무용가로 자리를 잡았다. 박병천의 진도북춤, 벽사 춤에 대한 열의와 방송매체와 여러 대학에서 교육과목으로 몫을 다지면서 전국 규모의 전수활동으로 우리 춤 본연의 역할을 담담히 수행하고 있다. 멋과 흥을 품어 내며 풍류색색의 가락은 휘엉청 감아내는 치마폭에 여실히 자아냄을 찾아 볼 뜻있는 춤판이다. 방방곡곡 춤꾼이어라... 정명자선생은 5세부터 쉼 없이 춤 공력에 전념으로 살아 온 한마디로 팔방 춤색이 역력한 매력 있고 다부진 춤꾼이다. 1983년 정명숙 명무 문하에 입문, 1985년 전사습 명인, 황재기 명인, 김숙자 명무에 이어, 1980년대 후반, 차례로 이동안, 박병천, 김진걸, 이매방, 김수악, 권명화 명무에게 전통춤 사사에 빠짐없이 수학한 이수자로 검증된 무용가이다. 제1회 발표회가 1986년 바탕골소극장에서의 인연과 문예회관(현, 아르코)에서 제2회 개인공연, 42회에 걸친 제작발표회, 전통을 바탕으로 한, 익히고 삭힌 민족의 혼을 담은 대형 무용극, 뮤지컬"이육사, 이순신의 바다, 의병장 곽재우, 문무대왕, 선덕여왕, 북소리, 농자천하지대본, 화랑의 혼”, 여성국극 "혜경궁 홍씨, 햇님 달님, 황진이” 창작화 작업에 초청되는 등,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위대한 업적을 다룬 시대적 표상 작품을 올린 바 있다. 미래 지향적인 춤꾼 정명자선생은 새롭고도 역량 있는 작업으로 오는 12월 대한민국 국제뮤지컬페스티발 초청작으로 ‘김유신장군’에 몰입 중에 있다. 이는 내재된 무한한 작품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예술가로서 묵혀 둔 본능적인 감각이 발현하는 소신 있고 범상치 않은 작업을 마땅히 해낼 분이라 본다. 소리와 악기에도 소질이 많은 정명자선생의 또 다른 멀티 콘서트도 기대해 볼만한대 언제가 될지 궁금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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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청 춤꾼 이동안한국무용가이자 재인청 춤 보존회를 이끌고 있는 정주미 춤꾼이 스승 이동안 명인에 대한 에피소드와 함께 재인청 춤에 대한 자신의 진솔한 여정을 에세이집으로 출간했다. 이동안 명인은 재인청의 예맥을 이어 내린 세기의 광대로 김인호의 제자다. 명창 이동백과 근대무용의 아버지 한성준의 증언에 따르면 김인호는 구한말 순종과 함께 대청마루에서 놀았던 광대 중의 광대였던 인물이다. 저자는 스승 이동안과의 만남과 사사, 그리고 스승의 사후로 이어지는 관계 가치를 진솔하면서도 질곡한 문장으로 소개한다. 스승과 제자라는 사이에서만 가능할 수 있는 소통의 과정을 여느 무용평론가의 문장과는 현저히 다른 편안하면서도 역사적인 통찰의 눈으로 보여준다. 저자 정주미는 프롤로그에서 "나는 춤꾼이다. 우리 춤에도 이른바 여러 유파가 있어서 굳이 유파 속에 나를 넣는다면 ‘재인청’이라는 유파의 춤꾼이다. 그런데 재인청은 한국무용사의 입장에서는 결코 유파가 아니다. 정리하면, 재인청은 하나의 유파인데 유파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 모순적 진술을 해명하기 위해...” 자신의 시각을 에세이 형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현실에서 만난 날줄의 스승 이동안은 낯선 언어와의 만남이라 규정한다. 그 낯선 언어들이 해독되는 지점이 바로 역사 속에서 만난 씨줄의 스승 이동안이 날줄과 교차하는 지점이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일정한 어법이 있었음을 이해하고 드디어 스승의 정체를 파악하는 구조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읽히는 한 편의 인물론이자 무용사라 할 만하다. 공연예술평론가인 이태주 박사는 서평에서 "재인청은 1824년 순조가 세운 중앙예인단체이다. 명무 이동안은 재인청의 혈맥을 이어나갔고 정주미는 그의 ‘태평무’ 이수자 제1호”라고 강조하고 "이 책은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사람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을 담고 있다. 재인청과 이동안의 관계, 재인청 춤의 원리와 스타일, 이동안 스승과의 만남, 춤 이수과정, 이동안의 삶과 예술 등 이동안의 심부(深部)를 파헤치고 있다. 무형문화재로 '발탈(발(足)에 탈을 씌우고 갖가지 동작을 연출하는 민속연희)이 지정되고 '태평무(왕과 백성의 마음을 담아 태평성대를 축원하기 위하여 추는 춤)'가 탈락하자 이동안 춤방에서 제자들이 사라진다. 그 암울한 상황에서 정주미는 홀로 스승 옆에 남아서 그의 지팡이가 되었다. 저자는 스승의 정체를 파악함과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과 앞으로의 지향에 선명성을 획득하고 있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단은 이를 잘 보여준다.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내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쏟은 시간이 이동안 선생께서 이 땅에 쏟은 시간에 대한 보답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선생의 삶이 ‘내가 왜 재인청 춤을 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이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이 책이 스승 이동안 춤꾼을 향한 제자의 헌사(獻辭)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는 염원을 담았다. 시인 정희성도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은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이 음악보다는 춤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묵언으로서 어떤 경지에 이르는 일이 가능할까? 나는 시를 쓰지만 시로서는 그것이 가능한 일이 아님을 안다. 오직 춤만이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렇다고 춤에 언어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춤에는 춤만의 언어가 있다. 춤꾼 정주미는 그 '낯선 언어'의 연원을 탐색하며 '삶 자체가 춤이 된 인물 이동안'을 만나고 마침내 그를 복원한다. 전통은 이렇게 하여 계승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며 그동안의 지난했던 노고를 치하했다. 한영혜 서울대 명예교수의 사회로 책속 엿보기 오프닝과 함께 오는 24일(토) 오후 3시, 과천시 소재 경기소리전수관 상상홀에서 조금은 특별한 출판기념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이 자리에는 재인청 춤과 인연을 갖고 있는 서정숙 한국민족춤협회이사장, 신새별 동시작가, 김세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 출판사 진인진의 김태진 대표의 축사에 이어 ‘저자에게 묻다’ 좌담과 저자의 ‘재인청 팔박기본무’ 공연이 진행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 저자 정주미는 초등학교 3학년때 한국무용에 입문하여 국가무형문화재 27호 승무와 경남무형문화재 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을 이수했고 1992년 춤꾼 이동안 선생을 찾아가 재인청 춤과 장단을 익혔다. 1998년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이동안 춤 세계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양대학교 평생교육원 무용과 강의를 위해 ’한국무용사 강의노트‘를 집필했다. 현재 전승 및 연구단체인 ‘재인청춤전승보존회’와 공연단체인 ‘재인청예술단’을 설립해 재인청 춤의 전승과 대중화를 위해 어린이와 노년층을 대상으로 활발히 황동하며 우리 춤의 대중화에 공헌하고 있다 특히 2002년 저자의 개인 공연인 ‘정주미 춤추러 간다’를 시작으로 2004년부터는 재인청예술단의 정기 공연인 ‘재인청 춤판’을 본격적으로 펼치면서 재인청 춤의 정수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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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산국악원, 전통예술과 함께 하는 4월의 ‘수요공감’국립부산국악원(원장 이정엽)은 전통문화 예술인을 지원하고, 창의와 계승의 전통예술가 정신이 담긴 <수요공감>을 개최한다. 4월 6일 첫 무대는 조선후기에 예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종합예술 전문교육기관과도 같은 재인청(才人廳)의 마지막 도대방(都大房·재인청의 장) 故이동안 명인의 맥을 이어가는 춤판이 관객들을 만난다. 또한, 재인 광대 故이동안의 삶과 그의 연행 특성이 춤의 기법으로 어떻게 전형화되었는지 영상과 해설을 더해 관객들과 소통한다. 공연은 ‘팔박수건춤’, ‘태평무’, ‘진쇠춤’, ‘기본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등으로 구성되어 이보름(한국춤교육연구회 상임 이사) 춤꾼과 함께 박정임(국가무형문화재 발탈 보유자)명인과 이동안-박정임춤보존회원들이 무대에 함께 오른다. 또한, 재인 광대 故이동안의 삶과 그의 연행 특성이 춤의 기법으로 어떻게 전형화되었는지 영상과 해설을 더해 관객들과 소통한다. 13일에는 소리꾼 김무빈(국가무형문화재 서도소리 이수자)이 무대에 올라 이북 지역 민요로 투박한 어투가 느껴지는 서도소리를 들려준다. 서도소리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발달한 우리 전통의 소리로 토속 민요나 굿에서 유래한 소리를 전문 예능인들이 가다듬어 발전시켰다. 20일에 개최하는 ‘수어지교’ 공연은 '비나리‘, ’서도濃; 개성난봉가-신고산타령-궁초댕기‘, ’태평소 시나위‘, ’경기무악濃‘ 등 이민형의 소리와 장구, 태평소가 어우러진 무대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을 졸업한 동료국악인들이 함께한다.27일 마지막 무대는 정악, 민간음악, 창작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하게 연주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금 연주자 손한별(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의 무대로 대금 명인 강백천(姜白川, 1898~1982)의 연주에서 나타난 육자배기와 줄풍류식 가락을 들을 수 있다. 대금의 매력적인 음색과 유려한 가락을 느낄 수 있는 이번 공연은 강백천류 ‘대금산조’, ‘젓대 즉흥곡’, ‘입춤’, ‘육자배기’ 등으로 구성되어 고수 이진희(국립부산국악원 기악단 악장), 아쟁 진민진(국립부산국악원 기악단) 등 동료 국악인들이 함께한다. 중견, 신진예술인들의 전통과 창작을 아우르는 폭 넓은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2022 '수요공감'은 3월 16일에서 11월 30일까지 총 24회의 공모공연을 개최하며, 상반기(3월~5월) 11회, 하반기(9월~11월) 13회로 나뉘어 운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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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춤꾼 - The 문진수’, 17일 브랜드 출시 기념공연춤꾼들의 춤 선생’ 문진수가 12월 17일 오후 7시 30분 한국문화재단공연장 ‘풍류극장’에서 쇠춤·소고춤·설장구·열두발상모춤까지 연희 4종목 전통작품을 재창작 및 재구성한 격조 있는 무대 ‘연희춤꾼 The 문진수 - 무천舞天’을 선보인다.남사당·승무·발탈·영광우도농악까지 4개 무형문화재 이수자인 문진수는 30여년간 전통예술을 연마하면서 한양대에서 무용학 박사까지 마친 문무를 겸비한 무용가이자 안무가다.문진수는 "흔히 한국 예술을 전공하거나 인간문화재에게 한국 무용을 배웠다고 하면 그대로 전승하므로 창작이 필요없다고 빠르게 판단해 버린다. 한국 전통문화를 '원형'이라는 테두리안에서 전승하는 것도 중요한 분야지만, 미래지향적 문화생태학에 의하면 한국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현대 트렌드에 맞게 재창작하는 '현대적 계승'으로 이어져가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문진수는 30여년 동안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박용태, 남기수 선생 등에게 남사당놀이를 배웠으며, 송재섭 선생에게는 무형문화재 제15호 승무를 이수했다. 박정임 선생에게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무형문화재 제17호 우도농악을 이수하는 등 오랜 시간 우리 문화의 보존·전승을 위해 노력하며 후학을 지도했다. 최근에는 그의 큰 스승 고 이동안 선생의 진쇠춤을 시나위 장단에 맞춰 재창작해서 발표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한량무, 덧뵈기춤, 버나놀이(춤), 징춤 등 전통을 재창작, 재구성한 작품들만 20여 종에 이른다.‘The 문진수’는 30여년간 인간문화재 스승들에게 정식으로 배운 한국 예술을 기반으로 트렌드에 맞게 현대인이 즐길 수 있도록 창작·제작한 여러 작품들을 통칭하는 브랜드다.1부에는 오갑순, 박귀희 명창의 제자이자 현재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수석인 위희경 명창이 가야금 병창가와 판소리로 특별 공연을 펼칠 계획이다. 2부에는 동아무용콩쿨 대상 출신으로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뒤 영국·러시아에서 활동하다가 현재 성신여대 교수로 재임하고 있는 김순정 교수가 특별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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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13)<br> '박경랑류 교방 살풀이춤' 춤사위교방 살풀이춤 우리나라에서는 수건춤을 현재 '살풀이춤'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원래 이름은 '수건춤'이다. 살풀이춤은 굿거리춤, 수건춤, 입춤, 허튼춤 등 다양한 명칭으로 쓰여졌으나, 1935년 부민관에서 가진 한성준 선갱의 첫 번째 무용발표회 때 '살풀이춤'이란 명칭이 최초로 사용된 이후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다. 이동안은 입춤을 기본춤 또는 수건춤이라 한다. 기본춤은 말 그대로 기본으로 추는 춤이라는 뜻이다. 이 춤은 무당들이 굿당에서 신을 영접하는 행위로 추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로 기생들이 주연(酒宴) 때 손님을 환영하고 영접하는 절차로 수건을 들고 춤을 추기도 한다. 살풀이춤은 일반적으로 무속에는 살을 푼다. 액을 푼다. 죽은 자의 넋을 천도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교방 살풀이는 기생들의 속내에 담긴 여러 가지 한을 표현한 춤이다. 흰 수건은 인생의 삶을 의미하며 살풀이에서 수건의 길이는 지방과 춤꾼마다 조금씩 다르다. 일반적으로는 길이가 2자이고, 도살풀이춤은 긴 12자이다. 교방 살풀이춤은 안방계열의 춤으로 길이가 1자 정도이며 아주 짧은 손수건 길이의 교방수건춤도 있다. 박경랑 현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보존협회 이사장 국립국악원 전통공연예술문화학교 교수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 1기 이수자 1995년 제21회 전주대사습놀이 무용부문 장원 1997년 제5회 서울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2019년 공연과 리뷰 PAF 예술상-전통무용상 2020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가 선정한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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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9문화재청 이소라 위원 참여 2000년대 들어 「국악신문」 편집(자문) 위원의 수가 늘었다. 기존 4명 내외에서 6명 내외로 확대된 것이다. 이는 「국악신문」의 편집 방향의 변화를 의미한다. 예컨대 2003년 1월 20일 자 제126호 판권에는 이소라 김명자 양종승 김연갑 김승국 김종철 6인이 표기된다. 이 중에 이소라와 김연갑은 민요연구 전문가이고, 양승종은 무속연구 전문, 김명자 김승국 김종철은 국악정책 연구 분야 전문가이다. 이 중 주목되는 분야가 민요 분야이다. 이 시기는 ‘mbc민요대전’이란 프로그램이 자리를 잡아 대중들에게 토속민요의 가치를 알렸고, 아리랑이 국내외에서 조명을 받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 같은 국악으로서의 민요를 주목하게 하는데 자극을 주고 제도권에 관심을 갖게 한 데에는 이소라 위원(당시 문화재청 상임 전문위원)의 기여가 컸다. 이에 따라 이 위원의 참여는 「국악신문」이 전국 토속 민요판에 관심을 확대시켜 주었다. 이번 회에서는 이 위원에 대해 살피기로 한다. # "1980년대에 당시 70세 전후되는 전국 각 읍면의 도민들을 방문하여 사라져가는 농요 등 전래민요를 집중적으로 녹음하였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보충 녹음과 연구를 계속하여 50여권의 저서와 1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전래민요를 보존하고 한국학의 기초를 닦는 일에 기여하였음.” 이소라 위원에 대한 각주(脚註)이다. 간명하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민요학 연구자임을 입증한다. 현장 음원이 첨부한 50여권의 전문 서적과 관련 논문 발표, 이는 한국학의 기초를 닦은 것일 뿐 아니라 민요의 학술적 가치를 인식시킨 성과이다. 국악 전공자라는 내적 조건과 문화재청 상근 전문위원이란 외적조건이 뒷받침된 것이다. 이 위원에게는 두 가지 직함이 쓰인다. 하나는 ‘문화재청 상임 전문위원’이고 또 하나는 ‘민족음악연구소(민음연) 소장’이다. 전자는 1983년부터 근무한 문화재청(문화재관리국) 소속의 각종 조사 보고서 상의 ‘전문위원 이소라(李素羅)’라는 직함이고, 후자는 1985년부터 1992년까지 발간한 「韓國의 農謠」제1-5집(玄岩社/民俗苑 刊) 같은 저작활동과 <민요권의 의미>(2003. 제1회학술 세미나 발표) 같은 행사의 주관처로서의 ‘나요당(羅謠堂) 이소라 소장’이라는 직함이다. 청주대학 등의 교수나 Arizona State University 등의 교환교수는 물론, 이를 포괄하여 세계적인 민속음악 전문가라는 직함도 있다. 특히 해외에서의 한국 민속음악 전문가로서의 활동은 이 위원만의 활동상으로 국가적 보상이 따라야 할 업적이다. 예컨대 1994년 개최한 아태음악학회 주최의 <한국과 일본의 교창식 모노래에 관한 고찰>(The study about the rice-planting songs of Korea and Japan), 2002년 필리핀국립대학 주최 <A Sharing of Musical Parts as a Manifestation of Cooperation and Joint Work in Korea>(A Search in Asia for a new theory of music] 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Center for Ethnomusicology), 2009년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주관 <아메리칸 인디언 구전 연구와 CD제작>에 참여한 업적은 한국의 음악학 수준을 세계에 알린 연구이다. 이 같은 성가는 이 위원의 전문가로서의 공력이 뒷받침해 주었다. 경기여고 졸업, 서울 법대 법학과 졸업(법학사), 이후 다시 서울음대 작곡과에 편입하여 수학하고 서울음대 대학원에서 석사,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예술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에 병행하여 7개 국악기와 춤과 성악까지 사사했다. 해금(강사준), 해금(김흥교/김영재/최태현), 거문고(이오규), 가야금(홍원기), 장고(박병천), 춤(이동안), 봉산탈춤(김유경), 여창가곡(홍원기/이석재), 가곡(전효준) 등을 사사하며 수학했다. 또한 한국정악원 풍류단에서 연주자로도 참여하였다. 이는 앞에서 제시한 50여 권의 저술과 100여 편 논문의 질적 보장을 담보해 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보상은 값지다. 1992년 KBS국악대상 출판상을 수상했다. 1996년에는 경기여고 동창회가 수여한 ‘열매상’을 받았다. 그리고 2014년에는 민요분야 상으로 최고의 권위를 갖는 ‘월산 임동권 학술상’을 받았다. 이 같은 수상은 그간의 공적에 비하면 미약하기도 하다. 앞으로 국가와 학계의 보상이 따를 것으로 기대한다. 이소라 편집자문 위원은 2000년대 전반기 「국악신문」과 함께 했다. 국악 전문지로서의 전문성을 높이고, 정론지로서의 위상을 높이는 데 힘을 더해준 국악신문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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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봉 - 최승희 춤맥 이은 한국 무용의 대가"정승집 개가 죽었을 땐 문상객이 줄을 잇고 막상 정승이 죽으니 발길조차 뜸하더라는 옛말을 떠올립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이 ‘현직’일 때뿐이라는 각박한 세태를 떠올리면 가슴 속에서 불덩어리가 치솟기도 하고······.” 이 시대 한국 무용의 대가로서 부채춤의 창무자인 김백봉(金白峰ㆍ경희대 명예 교수) 씨는 손바닥 뒤집듯 쉽게 변하는 세상 인심에 몹시 섭섭해 한다. 그 동안 가르쳐 놓은 제자들의 근황을 물으니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동아대와 한양대를 거쳐 1964년부터 경희대 무용과 교수로 재직해 오는 동안 수천 명의 문하생들을 양성해 냈지만 막판에는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 이라고도 표현한다.최근들어 김씨는 큰딸(안병수ㆍ33, 덕성여대 출강)의 한국 무용 이론과 막내딸(안병헌ㆍ31, 경희대 출강)의 무용 실기를 더욱 북돋워 주기 위해 남은 정열을 쏟아 붓고 있다. 여기에다 한국 무용을 전공하는 큰손녀(귀호ㆍ21, 경희대 무용과)와 둘째 손녀(혜진ㆍ16, 서울예고 2년)를 보면 새로운 용기와 힘이 솟구친다."내가 저 애들을 다시 싸잡아 가르쳐 그 최승희(崔承喜) 선생의 춤맥을 확실하게 이어 놓아야지······.” 김씨의 이런 결심은 모두가 1992년 3월 경희대 무용과 교수를 정년 퇴임한 후에 생긴 마음이다.무대 예술 인생을 소원했던 지망생치고 한 번쯤 ‘김백봉 문하생’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안 가져 본 사람이 있을까. 특히 그가 추어 내는 창작 화관무와 양손에 부채를 든 부채춤은 가히 환상적이다. 절도있는 각(꺾음)으로 수없는 변화를 연출해 내면서도 잎 피기 전 수양버들 가지가 한들대듯 끝간 데 없이 유연한 김씨의 춤집은 완벽에 가까운 육체 언어이다. 여기에다 빼어난 미모와 고혹적인 몸매까지 어우러져 젊은 시절의 그는 ‘군중의 우상’이었다. 여자 나이 70을 눈앞에 두고도 샘솟는 정열과 젊음을 간직하고 있는 김백봉 명예 교수. 한평생을 오로지 춤으로만 살아 온 그의 발자취는 근ㆍ현대 한국 무용사와 맥락이 통해 무용사 정리에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된다. 1927년 평안남도 기양에서 출생(2월 12일)한 김씨는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와 동서간이며 그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김백봉 씨의 춤 일생은 요행과 풍상,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이 겹친 가시밭길이었으며 때로는 목숨을 건 도박의 순간도 있었다고 한다.김씨의 무용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절세의 무용가 최승희를 알아야 한다. 1920년대 사회주의 문학을 이끌던 안막(安萬, 본명 안필승) 씨의 부인으로 광복 이후에는 월북해 북한 당국으로부터 ‘영웅’ 칭호까지 받은 ‘사상 무용가’이다. 최승희는 1926년 일본 현대 무용의 창시자인 이시이바쿠의 한국 공연을 보고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찬사와 비난을 함께 받아 왔다. "키가 175cm나 되었고 15세에 두 번이나 월반으로 숙명여고를 졸업했습니다. 사람을 뇌살시키는 뛰어난 미모에다 하루 16시간씩 연습하는 타고난 춤꾼이었지요.”김백봉씨의 남편 안제승(安濟承ㆍ72, 전 경희대 무용과 교수) 씨의 증언이다. 최승희 남편인 안필승 씨는 안제승 씨의 둘째 형이며 이래서 최승희와 김백봉은 동서간이 된다. 안제승 씨는 3형제이며 큰형 안보승(安輔承ㆍ87) 씨도 현재 서울 서대문구 역촌동에 생존해 있다.안필승ㆍ최승희 부부는 북한에서 ‘최고 예우’시절을 보내다 70년대 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숙청당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제승 씨는 "70년대 초반 인민숙소(시민아파트)를 배당 받았다고 들은 바 있으며 도주하다가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고 말한다. 1920년대만 해도 ‘신식 기술’이었던 트럭운전사의 딸로 태어난 김백봉 씨. 어릴 적 이름이 충실이었던 김씨는 거꾸로 태어나 ‘거꾸리 참외’로 불렸다고 한다. 평양의 명륜여학교에 다니던 시절, 당시 거리에 나붙은 최승희 무용 공연 포스터를 보고 무조건 무용가가 되고 싶어졌단다.아버지 손을 잡고 함께 진남포의 최승희 무용 공연장을 찾아간 것이 13세 때였다. 공연이 끝나고 분장실로 찾아가 "선생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울면서 매달렸다."그 때 최선생님은 쾌히 승낙하셨어요. 후리후리한 키에 꿈결같은 눈매, 날아갈 듯하며 잡힐 듯하던 몸매를 지금도 못 잊습니다. ‘형님’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지만 아무튼 그 분은 무용을 위해 전생부터 준비된 몸이었나 봐요.”그 해(13세) 6월 18일. 어린 김충실은 최승희를 찾아 일본 도쿄로 갔다. 당시 돈 300원을 허리춤에 끼워 주며 혼자 떠나는 어린 딸을 어머니 아버지는 울면서 보냈다. 그 때 아버지는 "일은 자기가 찾아서 하는 것.”이라며 굳은 의지를 심어 주었다고 회고한다. 김씨는 자신이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열 세 살의 소녀가 평양에서 일본 도쿄까지 갔는지를 모르겠다고 한다. 도쿄 최승희 무용소를 찾아간 김씨는 1년여를 빨래ㆍ청소하며 ‘하녀 생활’을 했다.여기서 만난 사람이 바로 현재의 남편 안제승 씨. 당시 안씨는 형수(최승희)와 함께 있으면서 주인집 가정 교사 생활을 했다. ‘선녀’ 같은 소녀 ‘김충실’에 반한 안씨는 이 때부터 사랑이 싹텄나 보다고 회고한다. 이렇게 해서 김백봉 씨는 최승희의 춤맥을 잇게 되고, 17세 때 첫 무대와 함께 이어지는 안제승 씨와의 결혼으로 최씨와의 관계가 더욱 확실해진다. 학도병에 끌려 가면서 김씨와 결혼한 안씨. 이들 부부의 사랑 얘기는 들을수록 애절하며 ‘안제승ㆍ김백봉 부부’가 지켜 온 한국 무용 반세기 또한 누구도 부인 못 할 큼직한 한국 무용사의 한 획을 긋게 된다.해방, 그리고 이와 더불어 밀어닥친 안씨 일가에 대한 국민들의 오해. 안필승ㆍ최승희, 안제승ㆍ김백봉 부부는 1946년 6월 월북했다."굳이 여러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곳에서의 환대와 감시 그리고 숙청 직전의 탈출 등을 생각하면 내 인생이 왜 이래야 하는지를 고뇌하게 됩니다. 더욱 중요한 건 최승희 선생과의 예술적 마찰입니다. 최선생의 천부적 예술에다 나 자신의 타고난 ‘끼’를 보태고 싶었던 거지요.”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온 이들은 다시 ‘요시찰 인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사상적 행적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순수한 무대 예술이었다. 이 와중에서도 박기홍 씨를 만나 승무를 전수받고 이동안(李東安) 씨를 만나서는 태평무와 승무를 떼받았다.화관무, 부채춤, 차일춤은 물론 무용극 ‘심청전’, ‘우리 마을 이야기’, ‘물긷는 처녀’ 등 2백여 편의 발표작 모두가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들을 감동시켰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축제서는 물론 그 이전에도 김백봉의 한국 무용은 세계인의 가슴 속에 한국의 예술혼을 뚜렷하게 심고 다녔다. ‘무용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조형적인 무대ㆍ육체 언어는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대학 강단과 김백봉 무용연구소를 통해 배출된 후학들만도 수천 명을 헤아린다. 김씨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가졌던 열정을 생각하면 세상 인심이 왜 이래야 하는지를 모르겠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행간’에 묻어 둬야 할 사연 들이 무수하다면서 노염을 다시 한 번 불태우겠다는 각오다.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그의 자택에는 보관문화훈장(1981년)과 함께 각국 에서 받은 훈장들이 거실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화려했던 지난날과 ‘현직’을 떠난 ‘거인’의 현실. 김씨는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살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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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기악, 소리, 춤, 무속, 공연놀이, 의례 등 우리 전통 예인 110인을 5개 분야로 나눠 소개한 책이다. 거문고 산 조의 강동일, 단소 김무규, 배뱅이 굿 이은관, 태평무강선영, 부채춤의 김백봉, 양주별산대놀이 김상용 등 명인들을 컬러사진으로 소개했다. [지은이] 이규원 194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주간 종교신문 취재부장으로 근무하면서 동서양 종교를 두루 섭렵했고 월간 『광장』 편집장을 역임했다. 1988년 세계일보에 입사하여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재냈다. 현재(사)한국언론인연합회 이사이며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 전수자이고 온 세종교신문 발행인 겸 편집국장이다. 1995년 『문예사조』지 시 부문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고 제6회 부원문학상을 받았으며 한국자유시인협회 이사로 시작활동 중이다. 이 책으로 제 27회 한국기자상 본상과 제36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고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차세애』(공저, 대원미디어), 『한국의 사찰 탐방』(공저, 불교사상사) 등이 있다 기악 1. 강동일 - 거문고 산조 2. 김무규 - 단소 3. 김영채 - 해금 4. 김오채 - 설장구 5. 김천흥 - 해금 6. 박귀희 - 가야금 병창7. 박동신 - 잽이 피리 8. 박범훈 - 피리9. 박종선 - 민속악10. 서용석 - 대금11. 윤윤석 - 아쟁12. 이생강 - 대금13. 이승렬 - 집박14. 전경환 - 농악 상회15. 전사섭 - 설장구16. 정달영 - 가야금 병창17. 정철호 - 아쟁 산조18. 지성자 - 가야금 산조19. 천대룡 - 고수20. 함동정월 - 가야금 산조21. 황병기 - 가야금 소리1. 강도근 - 동편제2. 강준섭 - 진도다시래기3. 김경복 - 서도 명창4. 김길임 - 강강술래5. 김덕순 - 여창 시조6. 김소희 - 동편제7. 김애정 - 국악인8. 남해성 - 여류 명창9. 묵계월 - 경기 12잡가10. 박동진 - 명창11. 박상화 - 영가무도12. 박송희 - 명창13. 박홍남 - 산유화가14. 선우향 - 여류 명창15. 성창순 - 강산제 명창16. 소동규 - 내포제 시조17. 신유경 - 육자배기18. 안비취 - 경기민요19. 안숙선 - 명창20. 안승삼 - 배치기 노래21. 오복녀 - 서도소리22. 오정숙 - 명창23. 이동규 - 남창가곡24. 이용배 - 임방울제 명창25. 이은관 - 배뱅이굿26. 이은주 - 경기잡가27. 장월중선 - 흥부가28. 정광수 - 명창29. 정회천 - 보성소리30. 조공례 - 남도 들노래31. 조상현 - 명창32. 조을선 - 제주 민요33. 조통달 - 명창34. 최광순 - 홍성 결성농요35. 최봉출 - 정선 아리랑36. 한농선 - 명창37. 한동희 - 회심곡38. 한승호 - 적벽가39. 황용주 - 선소리 타령 춤1. 강선영 - 태평무2. 김계화 - 교방굿거리춤3. 김덕명 - 양산 사찰 학춤4. 김백봉 - 부채춤5. 김수악 - 굿거리춤6. 김숙자 - 도살풀이7. 김진홍 - 한량춤8. 박정수 - 일무9. 박홍도 - 문둥북춤10. 안채봉 - 소고춤11. 양소운 - 해주검무12. 이동안 - 마지막 도대방13. 이매방 - 승무14. 이애주 - 승무15. 장금도 - 동살풀이춤16. 장홍심 - 바라승무17. 정경파 - 살풀이춤18. 하보경 - 밀양북춤19. 한진옥 - 춤꾼 무속1. 김금화 - 황해 강신무2. 김대례 - 진도씻김굿3. 김석출 - 세습 무가4. 김윤수 - 제주칠머리당굿5. 김점식 - 서울 무악6. 김찬섭 - 무악 피리7. 박병천 - 무악8. 박어진 - 서울굿9. 송동숙 - 오구굿10. 신석남 - 동해 세습무11. 오수복 - 강신무12. 오옥주 - 강신무13. 이선비 - 강신무14. 장보배 - 황해도 강신무15. 조한춘 - 경기 무악 공연 / 놀이 / 의례1. 공옥진 - 창무극2. 김덕수 - 남사당해3. 김복섭 - 독경4. 김상용 - 양주별산대놀이5. 김재원 - 남사당패6. 문장원 - 동래야유7. 박계순 - 남사당8. 박세민 - 염불9. 박송암 - 범패10. 박점실 - 동래야유11. 박후성 - 창극12. 여재강 - 북청사자놀음13. 이강덕 - 종묘제례악14. 이상호 - 하회별신굿탈놀이15. 이일웅 - 범패작법16. 조승자 - 어름광대 "이화 도화 행화 방초들아 일년 춘광 한틀 마라너희는 그리하여도 여천지 무궁이라우리는 단 백세뿐이니 그를 설워하노라"모시 적삼에 잠방이를 정갈히 다려 입고 통부채로 더위를 쫓으며 정자나무 그늘 아래서 세월을 희롱한다. 오가는 길손 있으면 어느덧 벗이 되어 비장해 두었던 한 수를 읊어 댄다. 거기에 동자 있어 밥 나르고 술 따르니 이 아니 신선일시고. 시조에는 군살이 없다. 초장 중장 종장의 3행으로 인간사 막힌 숨통을 터 주고 촌철살인하는 옛선비들의 기지가 넉넉하다.국내 유일의 여창 가곡 분야 기능 보유자(제30호, 1973년 지정) 월하(月荷) 김덕순(金德順.74) 씨. 김월하라고 해야 선뜻 알아듣는 '덕순 할머니'. 월하는 부산 구덕수원지 뒷산에서 시조 배울 적 '어느 후덕하신 어른'이 지어주신 아호일 뿐 이름이 아니라며 뒤늦게나마 덕순이라 불려 보고 싶다고 자청한다. - 본문 187쪽에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누구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얘깃거리가 있다. 막상 털어놓고 나면 별것이 아닌데도 혼자 보듬고 지척이며 가슴앓이를 해야 하는 비밀 같은 것 말이다. 바로 우리의 전통 예인들이 그러했다.민초들의 우상으로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이들은 오히려 민초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해 왔다. 민초들은 전통 예인들의 행위 예술에 도취되면서도 "내가 저 짓을 않길 다행이다." 하는 안도감으로 예기(藝技)를 즐겨 왔던 것이다.이토록 열악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소위 양반 부류나 가진 자들이 예인들을 대해 왔던 정서는 어떠했겠는가. 멸시, 천대, 경멸... 그래서 민중들의 예인들은 입을 다물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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